기도와 사랑으로 이화를 응원해 주신 후원자 분들의 아름다운 나눔 스토리 fnctId=bbs,fnctNo=61 47 건 게시물 검색 제목 작성자 공통(상단고정) 공지 게시글 2ⁿ 으로 퍼져나가는 나눔 릴레이 작성자 대외협력처 기부자명 장건수 연세대학교 수학과 명예교수 첨부파일 0 작성일 2021-01-19 조회 20 심리학과 학부생에게 지원되는 ‘임연화장학금’은 2011년부터 10년 동안 꾸준한 후원의 손길로 이어져오고 있다. 이 장학금은 故 임연화 동문(교육심리 68졸)의 부군인 장건수 연세대학교 수학과 명예교수가 아내의 후배들을 위하는 마음으로 조성했다. 장 교수는 2011년 사랑하는 부인이 작고하자 “아내는 이화에서 심리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교편을 잡았던 인연이 있어 모교와 심리학전공 학생들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며, “아내가 남기고 간 예금을 가장 값지게 쓰고 싶어 아내의 후배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기부하기로 가족과 뜻을 모았다"는 기부의 뜻을 전했다. 이렇게 시작된 장학금 기부가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꾸준히 이어져 어느덧 1억 원이 넘는 금액에 이르렀다. 사랑하는 이의 뜻과 이름을 이화에 영원히 남기다 故 임연화 동문은 기독교인으로, 생전에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싶다는 뜻을 자주 밝혔다고 한다. 아내가 병상에 있게 되면서 “내가 교회에 갈 수 없게 되었으니 나 대신 가달라” 하는 부탁에 이화여대 대학교회에 출석하면서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됐다는 장건수 교수는, 아내의 신앙이 담긴 평소 바람을 기억하고 작고 이후에 대신 이루어주기로 했다. “2011년에 아내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 장례식장에서 두 딸들이 어머니의 모교에 장학금을 기탁하는 것이 어떠냐는 의견을 먼저 주었지요. 사회 환원에 뜻이 있던 아내의 마음을 헤아려 가족 모두가 흔쾌히 찬성을 하였고, 이 인연으로 이화에 아내의 이름으로 된 ‘임연화장학금’을 기탁하게 되었습니다.” 장 교수는 늘 유쾌한 모습으로 이화를 방문한다. 평소 고인의 소원이자 바람을 기억하고 이루어 준 것이 기쁘고, 아내의 이름과 뜻이 이화에 영원히 남게 되어 고인을 추억할 수 있게 된 것이 감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2ⁿ 으로 퍼져나가는 나눔 릴레이 장건수 교수의 이화와 이화의 학생들에 대한 사랑은 아내에 대한 사랑만큼 지극하다. 매년 열리는 이화장학후원이사회에 빠짐없이 참석하여 장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따듯한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이화여대 이외에도 여러 후원 단체에도 기부하고 있는 장건수 교수는 이러한 장학생들과의 만남과 후원하는 학생들의 감사편지 등을 통해 그들의 처지를 알게 되고, 도움의 손길이 얼마나 절실한지 알게 되니 돕고 싶은 마음도 자연스레 점점 더 커져 꾸준한 기부로 이어지게 되었다고 밝혔다. 장건수 교수가 장학금 기부를 통해 바라는 것은 나눔의 릴레이가 이어지는 것이다. 그는 수학자답게 “한 명이 두 명에게만 후원을 해도 2¹, 2², 2³, 2⁴ ... 2ⁿ과 같이 금세 엄청난 규모로 발전될 것입니다. 릴레이처럼 이어진 기부가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닿아 문화가 되고, DNA로 심겨지기를 기대합니다”라고 덧붙였다. 이러한 기대는 기부자인 장 교수만의 바람이 아니라, 수혜 학생들의 바람이기도 하다. 지난 10년간 임연화장학금을 통해 도움을 받은 많은 장학생들의 편지에는 유난히 ‘자신도 나중에 커서 후배들에게 베푸는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이 빠지지 않았다고 한다. 장 교수는 “장학금을 통해 아내의 소중한 뜻과 마음을 받은 모든 학생들이 적은 금액이어도 다시 후원으로 되돌려 줄 수 있는 사람들로 잘 성장하여 다음 기부로, 또 다음 기부로 릴레이를 이어 갔으면 합니다. ‘나’로부터 시작되는 기부의 첫 발자국을 함께하여 주기를 바랍니다”라고 당부의 말을 전했다. 키다리 선배의 응원 작성자 대외협력처 기부자명 익명(통계학과) 첨부파일 0 작성일 2020-12-22 조회 136 통계학과 동창이 유학을 준비하는 후배들을 응원하기 위해 300만 원의 장학금을 후원했다. 익명을 요청한 기부자는 어려운 시기에 받았던 도움과 그 순간의 감동을 기억하며 더 많은 이화인들과 그 기쁨을 함께 하고자 나눔을 시작했다. 이 후원으로 조성된 장학금은 현대 확률을 정립하여 많은 통계학도들에게 존경받는 세계적인 수학자의 이름을 따라 ‘Andrey Kolmogorov(안드레이 콜모고로프) 장학금’으로 명명되었으며 통계학과 학부 및 대학원 재학생 중 미국대학 통계학 박사과정에 지원하는 1명에게 지급된다. 나눔의 릴레이, 나눔의 감동을 나눔으로 전달합니다 유학 생활 중 여러 장학금을 알아보고 도움을 받아왔기 때문에 기부의 중요성을 체감했다는 익명의 기부자는 “장학금을 후원해 주신 분들에 대한 깊은 감사함과 누군가가 나의 학문적·전문적 성과를 기대하고 응원한다는 든든함을 느껴 장학금을 수혜 받은 사람으로서 후배들에게 이런 감동을 전달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게 되었다”는 소감을 밝혔다. “외국에서 공부를 하며 힘들었던 것은 한 학기동안 살아갈 돈이 충분히 있는가에 대한 계산을 항상 해야 하는 것 이었다”라는 기부자는 가을과 봄에 받는 조교 급여를 일부 저축해 여름방학 동안 생활하면서 언제 큰 지출이 발생 할지 모른다는 불안함을 가지고 공부해야 했다. “다른 과 조교 자리나 장학금을 찾으려는 노력을 많이 했다. 장학생으로 선정되어 도움을 받았을 때는 정말 감사한 마음이 생김과 동시에 이 돈을 어디에 쓸지, 몇 달을 살 수 있는가에 대한 생각이 함께 들었다. 경제적 안정성이 부족한 상황에서 받은 장학금은 '아, 살았다!' 하는 안도감을 주었다”라며 장학금을 받던 순간의 기분을 전했다. 통계학과 동창은 "당시 수혜했던 장학금들의 주된 선발조건은 신청자가 학문적·전문적 자격을 갖추었는가, 여성 교육 발전에 기여할 것인 가였다. 이러한 선발 조건은 기부-수혜자가 직접 만나 장학금의 의미를 설명하고 당부하지 않아도 수혜자로 하여금 장학 후원에 담긴 깊은 의미를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라고 밝혔다. 누군가가 뒤에서 나를 지켜보고 응원하고 있다는 든든함은 타국에서 공부하는 유학생에게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전진할 수 있는 큰 위안과 희망을 주었을 것이다. 기부자는 본인이 경험했던 것처럼 이화의 후배들에게도 자신의 꿈을 지켜보고 응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기에 처음 장학금을 받았던 날부터 여건이 되면 꼭 기부하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한다. 키다리 선배가 당신을 응원합니다. 꿈을 향해 나아가기를 ‘내가 기부할 여건이나 자격이 되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던 익명의 기부자는 대외협력처에서 1년간의 모금 및 사용현황을 정리한 ‘2019-2020 연간보고서’에서 젊은 층의 기부 현황을 보고 나눔에 대한 의지를 실천에 옮겼다.“20~30대의 기부 참여율이 40~50대보다 높은 것을 보았다. 많은 이화인들이 액수나 자격을 따지지 않고 기부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평소에 생각하고 있었던 기부를 훗날로 미루지 않고 시작할 수 있었다”는 기부자는 “코로나19로 인해 모두가 힘들어하는 시기이고 특히나 유학은 돈이 많이 든다는 선입견 때문에 유학을 꿈꾸던 후배들도 학업을 포기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바로 지금이 기부를 시작하기에 좋은 시기라는 생각했다”는 후원의 계기를 밝혔다. 후배들에게 나의 꿈을 누군가 뒤에서 묵묵히 지켜보고 있음을 또 그 꿈을 실현할 수 있도록 응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는 기부자는 장학금 후원과 더불어 "선배가 응원하고 있으니 하고자 하는 바를 꼭 이뤘으면 좋겠다"고 말을 남겼다. 꿈을 잃지않고 소녀가 성장해 갈수 있도록 든든하게 뒤에서 후원을 해주었던 키다리 아저씨 처럼, 이화의 '키다리 선배'가 불투명한 미래로 힘들어하는 후배들에게 전한 것은 단순한 장학금이 아니라 불안함에 움츠린 어깨를 토닥이는 든든한 손길이자 어려운 상황에서도 앞을 향해 나아가는 이화인을 바라보는 따뜻한 눈길이다. 이제는 후원자가 된 선배라면 장학생들의 메세지 작성자 대외협력처 기부자명 선배라면장학생 출신 후원자 첨부파일 0 작성일 2020-11-10 조회 333 선배라면장학금 장수후원자들의 멈출 수 없는 후배사랑 이야기 작성자 대외협력처 기부자명 선배라면장학금 10년 후원자 첨부파일 0 작성일 2020-11-09 조회 586 선배라면장학금은 선배에 의한, 후배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재학생들에게 큰 희망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선배라면 누구나 월 1만원 정기후원으로 후배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2010년 11월 시작된 본 캠페인은 현재 모금액 30억 원, 장학생 3천명 이상으로 국내 최초, 최장수 소액기부 프로그램으로 굳건히 자리 잡았습니다. 무엇보다 시작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후원을 이어가고 계신 200여 명의 장수후원자들의 응원이 있어 더욱 특별합니다. 1호의 추억 김석향(북한학과 교수, 선배라면장학금 1호 기부자) 후원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떠올려 보면, 2010년 쌀쌀했던 어느 날, 연구실에 석사과정 학생이 저에게 따뜻하게 드시라며 차를 한 잔 사들고 와 있었습니다. 마침 선배라면장학금 제도를 시작한다는 메일을 보고 있던 중이었는데, 당시 일정한 수입이 있던 그 학생에게 ‘한 달에 한 번 정도, 차 한 잔 사줄 수 있나요?’라고 물었습니다. 어리둥절해 하는 학생에게 한 달에 차 한 잔으로 장학금을 후원할 수 있다며 동참을 권유했고, 함께 선배라면장학금 후원약정을 위해 대외협력처로 갔습니다. 그렇게 제가 선배라면장학금 ‘1호’ 약정자가 되고 그 학생이 ‘2호’가 되었네요.지나간 시간 동안 수많은 분의 도움을 받아 오늘날 이 자리에 오게 되었습니다. 물론 부모님의 도움이 가장 큽니다. 그렇지만 이화의 여러 선생님과 선배님, 같은 과 친구들 손길과 후원의 힘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결국 나눔과 후원이란 내가 받았던 것을 돌려주는 일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어린 시절에는 ‘도움을 준 손길의 받은 만큼 갚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도움을 요청한 사람을 도와주거나 도움을 줄 기회가 찾아왔을 때 놓치지 않고 나눔과 후원을 실천하는 일이야말로 사람의 도리’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선배’라는 이름만으로(황유경 동문, 생물 89졸) ‘선배라면’ 이라는 이름을 보고 선배 노릇을 안 할 수 없었습니다. 팍팍한 세상에 나갈 준비를 하는 후배들에게 선배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만 해도 힘이 날 거라 믿었습니다. 10여 년 전 사회생활을 하면서 후배들을 위해 멘토링을 시작했습니다. 이외에 또 다른 방법의 도움을 줄 수 없을까 고민하던 때에 선배라면장학금을 알게 되어 후원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급여에서 이 정도 나가는 것은 크게 무리가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부담 없이 할 수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작은 나눔이지만 받는 사람에게는 크게 다가가는 것 같아 행복합니다. 선배라면장학금을 통해 단순한 금전적 도움 뿐 아니라 ‘선배가 여기서 지켜보고 응원하고 있다’를 알려주고 싶습니다. 이화인들은 대단히 주체적이고 독립적이어서 모든 걸 스스로 하는 것이 익숙하죠. 선배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던가, 후배에게 먼저 다가가 손을 내미는 일이 잘 없었습니다. 학교에서는 늘 그것이 당연한 줄 알고 생활하다가 졸업을 했고,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막상 선배가 되어 멘토링과 장학금 후원에 참여하게 되면서 당시 선배들이 지금의 저와 같은 심정으로 저와 동문들을 지켜보고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손을 내밀어 도움을 요청해도 됩니다. 살면서 힘든 일을 만나더라도 선배가 응원하고 있다는 걸 잊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어려운 시기이지만 모두 힘내시기 바랍니다. 후원의 기쁨을 함께하기를 (이순남 의학과 명예교수, 이화아너스클럽 회원) 선배라면장학금이 어느덧 10주년이 되었고 많은 분의 동참으로 큰 성과를 이루고 있어 기쁩니다. 본인의 능력과 무관하게 환경에 의해 학업에 지장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합니다. 청년들이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국가와 사회의 책임이지만, 국가와 사회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수 없으므로 부족한 부분은 이화의 모든 구성원이 학생과 학교의 발전을 위해 지해야 할 책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후원을 받은 학생은 졸업 후 사회에 기여하는 인재가 되어 본인이 받은 후원을 사회나 후배에게 환원하는 선순환이 이루어져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후원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부담이 없는 소액기부이기 때문에 자동이체를 신청하고 통장에서 계속 이체되도록 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제게 나눔은 타인의 어려움을 지나치지 못하는 여린 마음이 만든 아주 작은 습관이고, 후원은 그저 나누기만 하는 게 아니라 기쁨을 얻는 일입니다. 선교사의 헌신으로 시작한 이화는 한국의 기부문화를 선도할 책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화의 가족들이 아름다운 기부행위를 통해 모교의 발전, 훌륭한 인재 양성과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 불평등이 없는 더 좋은 사회를 만드는 가치 있는 일에 동참하시기를 적극적으로 추천합니다. 작은 정성이 후배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니 참으로 기쁘고, 바라기는 동창생 모두 아니면 최소한 50%의 동창생이 참여하여 후배들이 더 많은 혜택을 받기를 바라봅니다. 지금 바로 행동에 옮겨 후원의 기쁨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5백 원으로 시작한 기부 작성자 대외협력처 기부자명 이경혜 명예교수(간호) 첨부파일 0 작성일 2020-09-15 조회 796 간호학 전공 이경혜 명예교수(간호 68졸)가 본교에 근무하기 시작한 때부터 퇴직한 이후에도 꾸준히 후원을 지속하여 2020년 1억 원 이상 기부한 고액후원자의 나눔을 기념하기 위한 공간인 기부자 명예의 전당 아날로그 월에 등재되었다.“1968년 졸업해서 학교의 추천으로 미국에 교환간호사로 갈 예정이었으나 신체검사에서 뜻밖의 결핵판정으로 부산에 낙향해 있다가, 1969년에 학교의 부름을 받아 이대동대문병원 학생기숙사 사감과 실습조교로 학교에서 일하기 시작했어요. 1964년 입학해서 2011년 퇴직까지 근 50년, 반평생 이상을 이화와 함께 하였네요.” 졸업 후 1년간 잠시 고향인 부산에 머물렀던 시간을 제외하고 이화와 오롯이 함께 한 세월이었다는 이경혜 교수는 2011년 퇴직 후에도 여전히 이화와 함께하고 있다. 5백 원으로 시작한 기부 이경혜 교수의 첫 기부는 졸업 전부터 참여하고 있던 밀알모임에서 후배들을 돕기 위해 만든 밀알장학금을 후원하면서 시작되었다. “학생 때부터 참여하고 있던 밀알모임에서 졸업 후 후배들을 돕기 위해 밀알장학금을 만들자고 하여 시작되었지요. 그 당시 조교 월급이 2천 원이었던 시절이었는데, 5백 원씩 매달 기부한 것이 시작이었네요. 그 후, 학교에서 모금할 때마다 거의 다 참여했어요. 십년발전계획 기금, 간호대학 건립을 위한 목적별 발전기금, 도서관, 과학관, 한우리기숙사 신축, 이대목동병원, 이대서울병원 신축 등 끊임없는 교내 모금활동에 모두 참여했어요. 정년을 10년 정도 앞두고는 이화의 발전과 학생들이 공부하는 데에 도움을 주기 위해 장학기금을 마련한 것이 가장 기쁩니다.” 이화에서 녹을 받는 교수로서 이화를 위해 기부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이경혜 교수는 이화와 학생들을 위해 지속적인 후원을 이어왔다. “주인은 하나님이고, 우리는 청지기이지요.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과 재산을 활용하여 어떻게 타인에게 베푸느냐 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화에 빚진 마음으로 조교시절부터 현재까지 한달도 기부를 안해본 적이 없어요. 기부는 나에게 자연스러운 생활의 일부이자 습관이 되었습니다.” 벌 수 있는 만큼 벌고, 저축할 수 있는 만큼 저축하되, 동시에 줄 수 있는 만큼 베푸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 하였다는 이경혜 교수는 기독교인으로서 하나님의 청지기 역할에 충실한 삶을 실천하고 있다. 이화의 매 순간, 모든 장소를 고스란히 기억하다 오래 전 제작한 이화 대학원 배지를 아직까지 착용하는 이경혜 교수의 이화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은 그 깊이와 넓이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크다. “이화는 제게 배움터이자 직장이었고 안식처였으며, 수많은 소중한 인연과 스승을 만나게 해준 고마운 존재입니다. 제 삶을 이화와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라는 이경혜 교수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이화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이 묻어났다. 인생의 대부분을 온전히 이화와 함께 한 이경혜 교수의 삶은 이화 곳곳에 녹아 들었고 이화의 역사는 이경혜 교수의 기억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학창시절부터 교수로 재직하던 때까지 이화의 중요한 순간부터 사소한 일화까지 어제, 오늘 일어났던 일처럼 생생하게 표현하는 노교수의 기억력과 애정 어린 관심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화는 격식과 품위가 있는 학교입니다. 그것이 이화의 전통이에요. 우리가 학교 다닐 때는 대강당에서⋯. 학관이 왜 C관인 줄 알아요? Classroom이 많다고 해서 C관으로 불렀어요. ⋯정의숙 총장님 이전에는 모두 힘들 때라서 학교 살림을 아주 검약하게 했어요. 환경이 정말 열악했는데⋯.” 화수분처럼 솟아나는 이야기에 즐거웠던 이경혜 교수의 회고는 마치 1960년대 이후 이화의 발전사를 압축한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이화의 어느 한 순간, 어느 한 곳 이경혜 교수의 관심과 애정이 닿지 않은 장면이 없었다. 이화의 학생들, 당당하게 세상 앞에 서기를 이화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이경혜 교수는 마지막으로 후배이자 제자들인 학생들에게 당부의 말을 남겼다. “이화의 학생들이 조금 더 자신감을 가졌으면 합니다. 정말 공부도 잘하고, 똘똘하고, 실무도 잘하거든요. ‘선택 받은 사람들이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자부심을 가졌으면 해요. 학생들을 가르쳐보면 압니다. 우리 학생들이 얼마나 뛰어나고 남다른 자세를 가졌는지 말이에요. 다른 학생들과 느낌이 다릅니다. 그런데 요즘 학생들을 보면 자신감이 부족해 보이는 모습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충분히, 오히려 넘치도록 똑똑하고, 잘하는데 말이에요. 이화에 온 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좋은 곳으로, 선한 뜻으로 인도된 것입니다. 우리 이화의 학생들이 높은 자존감을 가지고, 당당하게 이 세상을 살아나갔으면 좋겠습니다.” 든든한 후원,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주다 작성자 대외협력처 기부자명 은이선 동창(동양화 96졸) 첨부파일 0 작성일 2020-07-17 조회 1104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이화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얻었다는 은이선 동창(동양화 96졸)이 후배들에게도 이화가 소중한 경험으로 남기 바란다며 조형예술대학 발전기금 1억 원을 쾌척했다. “선배가 내미는 손길이 후배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재학시절부터 생각했었다”는 은이선 동창은 20여 년간 간직했던 꿈을 든든한 후배 사랑으로 실천한 것이다. 특별히 “조형예술대학 후배들이 사용하는 랩실 기자재 구입 및 환경 개선 등 실질적으로 필요한 곳에 쓰이길 바란다”고 기부의 뜻을 전했다. 든든한 후원,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주다이번 후원을 통해 조형예술대학 학생들의 실습 공간인 조형관 C동 B104호에 위치한 『메이커스랩 디지털샵』이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준비하는 최첨단 실습실로 새롭게 탈바꿈됐다. 리모델링된 디지털샵은 공간 분할이 없는 하나의 큰 개방 공간으로 재구성됨으로써 조형예술대학 학생들이 작업 결과물 및 워크스페이스를 공유할 수 있어, 작업능률 향상은 물론 커뮤니케이션 증대 효과까지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디지털샵에 3D프린터, 레이저 커팅기, 공판인쇄기 RISO프린터 등의 디지털 기기를 구비하여 물리적 제약을 뛰어넘는 작업 환경을 제공함으로써 기존의 전통적인 작품 제작 환경과 더불어 보다 폭넓고 다양한 실기 활동이 가능하게 된다. 대학에서의 공간은 단순한 교육 장소라는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미래의 인재들이 자라나는 창조의 공간이기도 하다. 은 동창의 후원으로 변모된 디지털샵은 이화의 학생들이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자신들의 작품세계를 마음껏 펼치며 무한한 가능성을 키워가는 소중한 공간으로 자리 잡을 예정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이화여대를 다니면서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은이선 동창에게 학창 시절은 누군가의 딸, 막내, 학생과 같은 가족 또는 사회 구성원의 한 명으로서 틀에 갇힌 “나”가 아닌 사회적 편견이나 제약 없이 자기 자신을 형성할 수 있었던 소중한 시기였다고. 여성이라는 제약이 존재하지 않는 이화의 분위기,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서로 격려하고 이끌어 주는 이화 가족들, 도서관의 방대한 자료, 예술에서부터 법학 등 전 분야를 아우르는 다양한 강의를 통해 은 동창은 사회에 진출해서도 어려움에 부딪히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는 바탕을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 실력, 자신감, 신념을 쌓아가는 중요한 시기에 이화와 함께 할 수 있었음에 감사한 마음을 전하며 본인이 이화에서 경험하고 얻을 수 있었던 중요한 가치를 후배들 또한 얻을 수 있기를 바랐다.은이선 동창은 “우리나라 학생들은 십대 때 입시준비를 하느라 나를 알아가는 시간이 부족해서 20대 때 ‘자아 찾기’ 시간을 가지죠. 이화 안에서 유연한 사고를 하는 법을 배우고, 정체성을 확립하는 시기를 가지기를 바랍니다. 사회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좋은 환경과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고 누리세요.”라는 당부와 응원을 남겼다. 나눔이란 숨 쉬듯 자연스러워야 나눔은 그들이 가진 것을 나도 얻고, 그들도 나에게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얻는 동등한 관계에서 이뤄지는 교감이기에 다른 사람을 동정하는 마음이나 우월한 위치로 하는 기부가 아닌, 숨 쉬듯 자연스러운 나눔의 태도를 가지도록 늘 생각한다는 은이선 동창. “후배들을 보며, 또 성장하는 제 딸을 보며, 앞으로 여성으로서 살아갈 이 세계를 좀 더 좋은 환경으로 만드는데 기여하고 싶다”는 희망을 전했다. 예술의 꽃을 피우다 작성자 대외협력처 기부자명 김영희 교수(무용과) 첨부파일 0 작성일 2020-06-04 조회 1046 2019년 5월 작고한 무용과 故 김영희 교수(무용 80졸)의 유족이 『김영희무용장학금』 1억 5천만 원을 기부했다. 이 장학금은 매 학기 학업과 무용 실기가 뛰어난 한국무용 전공 학부생 1명에게 500만 원이 지급된다.평생 가장 사랑한 세 가지 ‘이화, 무용, 제자’ 유족은 “고인의 이화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다. 중환자실 투병으로 인해 자가 호흡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고인이 말한 마지막 단어는 ‘학교는?’이었을 정도로 이화에 대한 사랑이 유별났다. 뼛속 깊이 무용을 사랑하고 제자를 사랑했다.”라고 회고했다. 가족 모두 고인이 생전 가장 사랑한 세 가지가 학교, 제자, 무용이었음을 잘 알기에 故 김영희 교수의 유지를 받들고자 하는 뜻을 전하며, 1억 5천만 원의 장학금을 기탁하였다. 故 김영희 교수는 1992년 9월 무용과에 부임하여 우수한 제자들을 다수 배출하고 재직 중 강의우수교원에 2번이나 선정된 바 있다. 또한 1988년 서울올림픽 폐회식 공동안무 지도위원등 주요한 행사 안무를 담당하고 활발한 국내외 공연을 전개하는 등 한국 창작무용계의 큰 별이었다. 1994년에는 제자들로 구성된 ‘김영희무트댄스’를 창단해 학생 한명 한명과 소통하며 교감하며 후학 양성에도 열과 성을 기울였다. 제자 은혜진(무용과 93졸)은 “비록 교수님은 떠나셨지만 단원들 모두 무트댄스에 남아 선생님의 뜻을 이어가기로 하였다”라며 스승에 대한 애정과 존경심을 드러냈다. 예술의 꽃을 피우다. 故 김영희 무용과 교수이런 제자들의 스승을 기리는 마음들이 모여 5월 28~29일(금) ECC 이화.삼성홀에서는 무트댄스의 1주기 추모공연이 열렸다. 본 공연에는 고인이 1983년 처음으로 안무한 작품인 나의대답Ⅰ을 비롯한 대표작이 선보였다. 공연에 참여했던 故 김영희 교수의 제자들은 “생전 교수님이 베풀어주신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다”며 “제자들이 각자의 ‘무트댄스’로 작품 활동을 펼치길 바라셨던 것처럼, 앞으로 단원들의 기량을 각자의 예술세계로 펼치며 교수님의 명예에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각오를 밝히기도 했다. 제자들 가슴에, 또 그들이 이어갈 무용단을 통해, 그리고 사랑했던 학교, 춤, 제자를 위해 이화에 큰 사랑을 남긴 故 김영희 교수. 그녀가 사랑했던 제자들과 이화는 故 김영희 교수의 예술가, 교육자로서의 끊임없는 도전, 노력, 헌신을 오래오래 기억할 것이다.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삶 작성자 대외협력처 기부자명 이진민 아이소이 대표(국문 86졸) 첨부파일 0 작성일 2020-06-01 조회 1357 이진민 아이소이 대표(국문 86졸)는 코로나19 극복 긴급 모금이 시작되자마자 “코로나19로 모든 분들이 어려워져 매우 가슴 아프다. 정규직은 물론, 단기 파트타이머 일자리조차 찾기가 힘들다니 학생들이 얼마나 공부나 생활이 힘들겠는가.” 라며 5천만 원을 기부했다.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에 기부를 결정했다는 이진민 대표는 전달된 기부금이 학생들이 누려야 할 기본적인 권리를 조금이라도 더 누릴 수 있도록 쓰여졌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후배들을 위한 따뜻한 위로와 응원의 메시지를 남겼다.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삶지속적으로 나눔과 기부활동을 이어 나갈 수 있는 무언가가 저에게 주어짐에 있어 한없이 감사한 마음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제가 가졌다고 해서 그것이 모두 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잠깐 통로로 쓰시기 위해 저에게 주신 것이라고 생각해요. 부족하지만 제가 그 통로로 쓰일 수 있음에, 누군가에게 기쁨을 나눌 수 있음에 늘 감사합니다. 또한 저에게 나눔 활동은 마땅히 해야 할 사회적 책임이기도 합니다. 제가 학교를 다니고, 직장에 취직을 하고, 또 저의 브랜드를 운영해 나갈 수 있었던 데에는 주변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지지, 사회적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제가 앞으로 살아 나가면서 꾸준히 갚아야 할 빚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개인적 삶을 통해서는 물론, 운영하고 있는 사업을 통해서도 사회적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할 생각입니다. 삶의 지평을 확장 시켜준 이화여성이어서 해야 할 일, 하지 말아야 할 일 등 사회적 억압을 뒤로하고, 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준 곳이 바로 이화입니다. 여성으로서의 자존감을 높이고, 삶의 지평을 넓혀준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성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의 기초를 이화가 마련해주었습니다.저는 제가 가는 곳이 새로운 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후배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이 갈까 조금은 두려운 마음으로 일했습니다. 아마 많은 이화 동창들이 공감하실 것 같은데 저 때문에 혹시나 후배들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다는 생각에 더 열심히 했습니다. 제가 잘해 놓아야 후배들의 환경이 좋아지고, 결국 그게 내 딸의 환경이 좋아진다는 생각이었어요. 지금 제가 여성 비즈니스를 하는 것도,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라고 말하는 것도 이화에서 다진 가치관이 기저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 일겁니다. 지금 그대로의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그대,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사랑 받을 이유가 충분하다.‘코로나19’가 유행처럼 번지며 우리 청년들의 생활과 심적인 부분까지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이런 말을 해주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의 대단한 우주이자, 새로운 세계라는 것’,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사랑 받을 이유가 충분하며, 지금 그대로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말이에요. 우리 학생들이 사회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보다 자신을 더 귀하게 여기고 사랑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사회적 역할에서 오는 기대감에 꺾여 자신을 희생하는 것보다 자신을 위해 투자하고 꿈을 위해 나아가길 바랍니다. 또 한가지 안타까운 것은 최근 우리 학생들이 금수저·은수저를 언급하며 스스로를 제한하는데, 절대 인생은 그것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현실의 어려운 상황에 집중하기 보다는 어려워도 극복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이 길이 닫히면 저 길이 열린다는 믿음을 갖고 나아가길 바랍니다. 부르심, 나눔으로 응답하다 작성자 대외협력처 기부자명 이명경 총동창회 부회장(무용 77졸) 첨부파일 0 작성일 2020-03-26 조회 1404 젊은 시절 이화에서 받은 사랑을 아름답게 갈고 닦아 다시 이화에 소중한 마음과 후원을 배로 나누고 있는 이명경 총동창회 부회장. 그녀가 발견한 인생의 아름다움은 ‘나눔의 기쁨’이다. 이명경 총동창회 부회장(무용 77졸/석사 86졸, 신학대학원 01졸)은 이화를 향한 한결같은 기도와 봉사뿐만 아니라 후배를 위한 장학금으로 때로는 학교발전을 위해 이화에 도움이 필요한 순간마다 물심양면으로 모교를 후원해왔다. 또한, 2020년 이화미래전략기금 추가 후원을 통하여, 이화 모금사업에 1억원 이상 기부한 고액후원자에게 자격이 부여되는 이화아너스클럽 회원으로 위촉되었다. 늘 이화를 위해 헌신 해주셨습니다. 부회장님께 이화란 어떤 의미인지 궁금합니다.신앙이 일상이었기에 학교 다닐 때는 예배가 있어서 좋았고, 학교 분위기와 일상이 이어져서 물 흐르듯 편했습니다. 모교를 떠나서 바깥 생활을 해보니 이화의 품에서 청년의 때를 보낸 일이 더욱 감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 시간을 바탕으로 오늘의 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화가 있어 하느님의 정신이 제 삶에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제게 이화는 삶의 연속이자 삶과 이어지는 일상의 흐름이랄까요? 항상 저를 이화로 이끄시는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도 총동창회 부회장직을 맡아 달라는 전화를 받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 모양 저 모양의 사역을 하고 있던 중이라 완곡하게 계속 사양했으나, 권면하시는 선배님께서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이제는 모교를 위해서 기도할 때라고 말씀하셨고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이 나이에 다시금 부르심을 받아 모교 이화와 동창회를 위해 기도하고 섬길 수 있어 기쁩니다. 이화를 위해 기도뿐 아니라 나눔도 열심히 하셨는데, 부회장님께 나눔이란 어떤 의미일까요?신학대학원을 다니면서, 등록금으로 어려움을 하소연하는 원우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마음에 감동이 있어서 지금까지 작으나마 장학금을 나누고 있습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데,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일도 드러낼 일도 아닌지라 인터뷰 하는 것이 참으로 민망합니다. 이렇게 나눔을 이어갈 수 있음이 감사할 뿐입니다. 무용과를 졸업하셨는데 신학대학원으로 진학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무용과를 졸업하고 이화의 교정을 떠나 타교에서 강의했습니다. 그러다 이화에서 드렸던 예배무용 채플을 떠올렸고, 제자들과 함께 ‘나눔터’라는 이름의 예배 무용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학적 뿌리 없는 사역에는 늘 갈급함이 있었고, 때마침 이화에 신학대학원이 설립된다는 소식을 듣고 1기로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채플에서 예배 무용을 본 기억이 납니다. 처음으로 접한 무용 채플이 아직도 강하게 뇌리에 남아 있는데, 혹시 채플 예배 무용에도 참여하셨나요?모교 채플에 예배무용이 올려졌던 초창기에 살짝 도움만 드렸습니다. (웃음) 예배무용을 지속하고 있는 이화에 감사한 마음입니다. 이화와 후배를 사랑하시는 마음이 지극하게 느껴집니다. 후배들을 위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제 청년 시절의 경험을 떠올리며 세 가지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하나, 여유와 여백을 가지세요. 청년의 때는 안과 밖의 기운이 넘치다 보니, 여러 가지로 분주합니다. 그렇게 분주한 시간을 보내다 불현듯이 불확실한 미래로 숨이 막힐 듯 힘들기도 하고, 또 어느 순간에는 씨줄과 날줄로 순조롭게 엮여 있다고 믿었던 관계들이 비교의식이나 경쟁심으로 어그러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잠시 머물러 자신을 성찰해 보는 여유와 여백을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둘, 주어진 일을 기쁘게 하세요. 무슨 일을 하느냐보다 어떻게 하느냐가 참으로 소중한 가치관이라고 여겨지기에 정직하고 최선을 다하되 무엇보다 기쁘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셋,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을 마음껏 사랑하세요. 사랑하는 우리 후배들이 이화의 교정에서 모든 생명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후회 없이 마음껏 사랑하면서 자신의 인생에 가장 유의미한 때를 누리기를 기대합니다. 마음 모아 기도하겠습니다. 열정과 긍정의 메시지, 이화에 오롯이 영원히 작성자 대외협력처 기부자명 한소엽 교수(화학·나노과학 전공) 첨부파일 0 작성일 2020-03-25 조회 1507 작년 가을 작고하신 화학·나노과학 전공 고(故) 한소엽 교수(화학과 학부 80, 대학원 83졸)의 유족이 평생 이화와 이화 학생을 사랑하고 헌신했던 고인의 뜻을 기리고자 1억 원을 기부하였다. 고인의 유산으로 조성된 기부금은 화학·나노과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의 학업을 지원하기 위하여 ‘한소엽 연구격려장학금’으로 명명되어 화학·나노과학전공 후배들을 위해 쓰여진다. ‘한소엽 연구격려장학금’은 이화의 후배들이 여성 과학자로서 우뚝 서기를 바랐던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학생들이 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본교 장학기준을 충족하는 화학·나노과학 전공 박사과정 진학생 전원에게 지급되며 선발은 1년 2회, 장학금 지급은 입학하는 첫 학기에 이루어진다. 제자들에게 환한 미소의 열정적인 스승으로 기억되는 고(故) 한소엽 교수는 제자인 동시에 후배인 학생들이 ‘스스로를 믿고, 원하는 일에 열정을 다해, 세상을 향해 당당히 나아가길’ 바랐다. 아낌없는 가르침과 사랑을 베풀었던 고인의 열정은 ‘한소엽 연구격려장학금’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화에 사랑과 희망을 남기고 떠난 고(故) 한소엽 교수는 고인이 남긴 소중한 뜻이 닿은 모든 이의 가슴속에 앞으로도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고(故) 한소엽 교수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던 열정의 소유자였다. 세 차례나 강의우수교원에 선정된 이력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학생들을 위한 정성과 노력은 대단했다. 2018년 강의우수교원 상패수여식 사진에서 보이는 더없이 환한 미소의 그녀는 여전히 활기차고 당당한 모습 그 자체였다. 교수님을 그리워하며... 고(故) 한소엽 교수는 사랑하는 이화의 학생들에게 매사에 열정적인 가르침과 긍정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는 롤모델이었다. 또한 기쁜 일과 슬픈 일을 가리지 않고 편안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제자들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그녀의 제자들은 그 버팀목을 대체 불가한 열정, 긍정, 당당함이라는 세 단어로 기억하고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가슴속에 기억할 것이다. 아버지의 백년대계 작성자 대외협력처 기부자명 전희영, 전희송(의학 87졸) 자매 첨부파일 0 작성일 2019-12-19 조회 1676 흔히 교육은 백년대계라고 합니다. 1년 계획으로는 곡식을 심는 일만한 것이 없고, 10년 계획으로는 나무를 심는 일만한 것이 없으며, 평생 계획으로는 사람을 심는 일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여기 교육을 통해 아버지의 백년대계가 이어지기를 바라는 두 딸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유산을 EGPP장학금으로 기탁한 전희영, 전희송(의학 87졸) 자매입니다. 두 분이 EGPP전찬화장학금 각각 5천만원씩 총 1억원을 기부하셨는데, 그 계기가 궁금합니다. 전희영_아버지가 이화여대에서 1998년도에 은퇴하신 전찬화 심리학과 명예교수이세요. 작년 10월에 돌아가셨으니까 꼭 1년이 되었네요. 저희 자매에게 작은 유산을 남겨주셨는데, 어떻게 하면 아버지의 유산을 값지게 쓸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이화여대에 장학금을 후원하게 됐어요. 늘 이화를 사랑하고 후학 양성을 위해 애쓰셨던 아버지의 바람을 이화의 어딘가에 남기고 싶었거든요. EGPP장학금에 대해 알고 계셨나요? 전희송_아뇨. 전혀 몰랐어요. 아버지 성함을 넣어 그 뜻을 기릴 수 있는 장학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김혜숙 총장님께서 EGPP장학금을 후원하라고 권해주셨어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제3세계 여성인재를 키우는 전액 장학금 프로그램이라고 하더라고요. 전희영_아버지도 전쟁 직후 매우 어려운 시절에 미국 텍사스로 유학 가셨는데 다행히 학과 여교수님의 도움으로 장학금 받으면서 공부를 마칠 수 있었다고 하셨어요. 귀국하신 후에도 편지도 하고 우리들 옹알이도 녹음해서 보내시면서 인연을 이어오셨는데, 나중에 그 교수님이 돌아가실 때 아버지한테 유산을 남겨주실 정도로 각별하셨다고 해요. 생면부지의 미국 여교수님이 우리 아버지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신 것처럼 아버지의 유산이 다시 제3세계 여성인재를 키우는 장학금으로 쓰이게 되어 매우 기쁘고 뜻깊게 생각합니다. 두 분 교육자의 정신적 유산이 3대에 걸쳐 이어지는 거네요? 전희영_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교육적 유산이 계속 이어지게 되다니 참 감동적이에요. 앞으로 아버지의 장학금을 받은 EGPP장학생도 쑥쑥 잘 성장해서 또 다른 누군가에게 교육의 기회를 전하는 사람이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사람을 심고 키우는 교육의 대물림이야말로 아버지, 전찬화 교수님이 꿈꾸셨던 진정한 백년대계가 아닐까요? 전찬화 교수님은 어떤 아버지이셨나요? 전희송_천상 학자에 선비셨죠. 마르고 단호하고 그러면서도 참 부드러운 분이셨어요. 그 시절에는 남아선호가 강했을 때지만 아버지는 우리 두 딸만 낳고 세상 전부인 것처럼 아끼고 사랑해 주셨어요. 인터뷰에 앞서 전찬화 교수님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다가 재미있는 에피소트 하나를 알게 됐어요. 1952년 6.25 전쟁이 한창인 어느 날 부산의 이화여대 피란 교사에서 ‘이화 문학의 밤’이 열렸는데 전쟁의 시름을 잊으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해요. 그 날 양명문 시인이 훗날 국민가곡이 된 자작시 ‘명태’를 낭송하고, 근처 서울대 임시 교사에 다니던 교육학과 동기 남학생 3명은 초대장이 없어서 천막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몰래 ‘명태’를 들었다고 하는데요, 재미있는 건 나중에 그 남학생들이 모두 이화여대 교수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전희영_하하! 저 그분들 모두 잘 알아요.(웃음) 황응연(교육심리학), 김재은(교육심리학) 교수님, 그리고 저희 아버지 이렇게 세 분 교수님이시죠? 이화와 인연이 되시려고 그렇게 몰래 청강하셨나보네요.(웃음) 아버지 절친 분들이시라 그분들 자녀하고도 무척 친해요. 같은 초등학교 다니며 언니 동생하는 사이고 친구 아버지들이시라 가족처럼 친하게 지냈어요. 두 분께 이화란? 전희영_어릴 때 이대 후문 쪽 봉원사 아랫집에 살면서 이화유치원과 이대부초를 다녔어요. 대학은 카톨릭 의대를 나왔지만 이화는 제게 고향처럼 푸근하고 동네 놀이터 같이 즐거운 곳이죠. 이화 안에서 우리 가족 모두가 행복했던 추억이 참 많아요. 전희송_저는 대학까지 이대 의과대학을 나와서 뼈 속까지 이화인이랍니다. 어릴 때 성탄이 가까울 무렵이면 집에서 총총 걸어 나와 대강당에서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를 봤던 기억이 생생해요. 꽃피는 봄이면 본관 앞에서 가족사진도 많이 찍고, 또 눈 오는 날이면 대강당 옆 비탈길에서 썰매도 많이 탔고요. 아버지가 평북 강계 출신이시라 눈을 참 좋아하셔서 눈이 내리는 날이면 이화 캠퍼스로 온 가족이 출동했었죠. 추억은 눈을 감지 않는다는 말이 있잖아요? 이화는 제게 늘 아버지와의 추억이 생생히 살아있는 곳이죠. 글_김효정 보자기로 엮는 인생수업 작성자 대외협력처 기부자명 이성순 명예교수(섬유예술전공) 첨부파일 0 작성일 2019-12-11 조회 1688 늦가을이 물든 이화교정에서 이성순 명예교수(섬유예술전공)를 만났다. 까만색 롱코트와 하얀 블라우스, 수공예 스카프로 멋을 낸 그녀. 70대 중반의 나이가 무색할 만큼 멋짐을 발산하고 있었다. 늘 멋지신데, 특별한 비결이 있으신가요?첫째는 제게 어울리는 옷을 즐겨 입어서 그리 보이는 걸 거예요. 이 검정 코트는 제자가 선물해준 옷인데 30년도 넘은 아주 오래된 거죠. 그동안 몸이 불어서 여며지지도 않고 안쪽 솔이 헤질 정도로 낡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옷이라 오랫동안 즐겨 입고 있어요. 둘째는 유행을 따라가기보다 나다움을 찾고 나답게 입으려는 고집이 제 스타일을 만든 결과인데, 좋게 보아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나라 1세대 섬유예술가로 유명하신데.어려서부터 바느질을 잘했어요. 다림질과 재봉에도 재주가 있었고요. 50년 넘게 해 왔으니까 섬유예술은 제 인생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제가 섬유를 택한 건 제 말을 가장 잘 듣는 게 섬유였기 때문이에요. 친근하기도 하구요. 그런데 제가 깜박 속았습니다.(웃음) 50년 해보니 느끼는 건 말을 잘 듣는 척하지만 실제로 무척 예민하고 다루기 어려운 것이 섬유더라고요. 세월이 더할수록 점점 더 어려워져요. 섬유예술 1세대로서 책임감도 느끼고요. 한국 보자기를 작품으로 승화시켜 전 세계에 알리신 걸로 알고 있어요.처음에는 순수예술로서의 섬유예술을 했었어요. 그러다 2000년에 모교이기도 한 시카고예술대학에 연구년을 다녀올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문화적인 충격을 받았습니다. 세계 예술시장의 큰 변화의 흐름을 보고 한국에 돌아와서 선택한 것이 보자기였어요. 우리 보자기를 세계적으로 만들겠다고 결심한 거죠. 그때부터 제자들과 함께 보자기를 활용해 연구하고 만드는 작품 활동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 노력 덕분인지 2010년 시카고예술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까지 받게 됐습니다. 외국인으로는 두 번째, 아시아인으로는 처음이라고 하네요.그러나 여전히 할 일이 남았습니다. 우리나라 10명의 보자기 작가들을 선정해 세계 속으로 나간다고 선언했는데 아직도 그 숙제를 못했으니까요. 이제 그 숙제를 마저 할 계획이예요. 왜 하필 보자기인가요?제가 보자기작품으로 다루는 재료는 모시인데 모시의 특성은 투명함에 있어요. 저는 그 투명함이 참 좋아요. 작품이든 일상생활이든 또 사람에게도 투명에 진실이 있듯이 섬유의 본질을 가장 잘 표현 할 수 있은 재료라 생각합니다. 또 모시는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햇살을 가득 머금어서 참 따뜻해요. 흰 모시를 조각조각 붙여서 작품을 만드는 일이 우리 인생과도 닮았습니다. 서로 다른 일상의 파편이 모여 하나의 인생을 완성한다는 점이 매력적이지요. 그리고 보자기는 매우 유용한 소재예요. 제가 예술작품을 실생활에서 쓸 수 있는 작업을 하는 공예가이기에 실제로 전시했던 작품을 집에서 커튼이나 식탁의 러너로도 사용하고 있지요. 최근 이성순장학금 7천만 원을 후원하셨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으신지?제가 2008년에 은퇴할 때 당시 퇴직금의 반인 3천만 원을 장학금으로 후원했었어요. 그런데 10년이 지나도록 좀 더 할 걸 하는 아쉬운 마음이 있는 거예요. 그러다 얼마 전에 제가 50년 살던 건물이 재개발되는 바람에 갑자기 생각지도 않았던 목돈이 생겼지 뭐예요. 아싸, 기회다 싶었죠.(웃음) 7천만 원을 보태 이성순장학금 1억 원을 완성했습니다. 해묵은 숙제를 마치고나니 어찌나 시원하던지...! 저의 인생 숙제를 흔쾌히 도와준 남편에게도 정말 감사합니다. 나에게 나눔이란?매일매일 해야 하는 인생 숙제라고 생각해요. 저는 크리스천 집안에서 자라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용돈 주시면 교회에서 헌금했어요. 그냥 당연한 일상 같은 거였죠. 헌금해본 사람은 알거예요. 내 손에 쥐고 있는 돈이 내 돈이 아니라는 것을요. 후원자로서 보람을 느끼는 점이 있으시다면?올해 처음 조형대 장학생의 편지를 받았어요. ‘매번 작품을 만들 때마다 재료비 대기가 힘들었는데 올해는 그런 걱정 없이 작품에 몰두할 수 있어 정말 좋다. 최고의 졸업 작품을 만들 수 있겠다’는 글을 읽고 정말 감동했어요. 사실 조형대 학생들은 등록금보다 재료비 걱정이 더 크거든요. 나의 작은 도움이 후배들에게 큰 힘이 된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보람을 느낍니다. 앞으로도 이화에서 배운 사랑과 감사를 후배들을 위해 다시 돌려주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이화인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은.우리 이화의 졸업생들이 더 적극적이고 넓은 마음으로 세상을 보았으면 해요. 크리스천으로서 예수님이 어떻게 사셨나를 보고 그 길을 따라 살았으면 합니다. 바르고 당당하게, 그러나 교만하지 않게, 더불어 나누며 사는 이화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글_김효정 기쁨과 기도와 감사로 채우는 일상 작성자 대외협력처 기부자명 박하영 동문(약학 77졸) 첨부파일 0 작성일 2019-09-30 조회 1704 이화에는 사랑과 나눔의 리더, 이화아너스클럽이 있다. 이화아너스클럽은 이화발전을 위해 1억원 이상 기부한 고액후원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자 2012년에 발족한 고액 기부자 클럽이다. 지금까지 291명이 이화아너스 회원으로 위촉되어 우리 사회의 기부문화를 선도하고 있다. 최근 이화아너스클럽에 이름을 올린 박하영 동문(약학 77졸, 전 약학대학동창회장). 그녀를 만나 아너스 회원이 된 소감과 기부철학에 대해 들었다. - 이화아너스클럽 회원이 되신 소감을 말씀해 주세요.이화인의 한 사람으로서 이화 발전에 작은 부분이나마 기여하게 된 것도 기쁘고 감사한데, 아너스클럽 신규회원이 되었다니 큰 영광입니다. 1996년부터 20년 넘게 꾸준히 모교 후원을 이어오다 보니 덤으로 이런 영예도 누리네요. 이화아너스클럽에는 우리 사회와 모교 발전을 위해 애쓰시는 훌륭한 분들이 참 많으시다고 들었습니다. 이분들과 소중한 인연을 맺게 되어 매우 기쁘게 여기고 있어요. - 약대건축기금과 약학대학1060장학금 등 주로 약학대학 후배들을 위한 기부를 많이 하셨네요?제가 2015년에 약학대학동창회장을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모금 활동을 시작했어요. 솔선수범해야하는 자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기부를 적극적으로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약대가 통합6년제로 바뀌면서 연구시설 투자와 낙후된 시설개선이 필요해서 동창회 차원에서 약대건축기금을 열심히 모으고 있습니다. 약학대학1060장학금은 한사람이 10만원씩 60개월을 모아 후배에게 한 학기 장학금을 후원하자는 취지로 시작되었어요. 뜻이 참 좋은 캠페인이라서 우리 약대뿐만 아니라 이화대학 전체에 1060장학금이 널리 퍼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학교에 삼정장학재단장학금 4천만 원도 후원하셨는데 특별한 의미가 있나요?현재 남편이 제약회사 다림바이오텍을 운영하고 있고 39년동안 약업인의 길을 걸어 왔어요. 2002년에는 후학양성을 위한 삼정장학재단을 설립하게 되었고 장학재단 건물에 ‘카페루치아’를 운영하여 수익금 전액을 장학금으로 후원하고 있습니다. 루치아는 라틴어로 ‘빛’이라는 뜻이에요.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빛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지은 이름이죠. 제가 평소 모아두었던 소품들을 집에서 가져다 꾸몄는데 카페 후기를 보니 유럽풍의 멋쟁이 할머니 집에 놀러온 것 같다고 하더군요.(웃음) 제가 직접 커피도 내리고 설거지도 하면서 학생들과 함께 즐거운 마음으로 자원봉사하고 있어요. - 나에게 나눔이란?‘기쁨’이지요. 저는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 아름다운 삶이라 생각하는데 그게 바로 나누는 삶이 아닌가 합니다. 나 혼자 잘되면 행복하나요? 우리 모두가 잘되어야 행복하지요. 두루두루 주변을 살피면서 함께 나누며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진정 ‘잘사는 삶’ 아닐까요? - 요즘도 이화 캠퍼스에 자주 방문하신다고요?이화 ALPS(정책과학대학원 여성최고지도자과정) 수업 듣느라 20년 동안 매주 월요일마다 등교하고 있어요. 저는 제 인생 최고의 선택 중 하나가 ALPS라고 생각합니다. 마흔 한살에 처음 ALPS에 들어와서 좋은 인생 선배들을 만나 사람을 이해하고 수용하고 사랑하는 법 그리고 최고의 매너를 배웠거든요. 감았던 눈이 떠지고 새로운 세상을 만난 느낌이랄까요?(웃음) 제가 열심히 전도한 덕분에 큰동서와 시누이도 우리 이화 ALPS 동문이 되었답니다. - 나를 정의할 수 있는 단어가 있으시다면? 그 단어를 선택한 이유는?‘어린모’요(^^). 이화 ALPS에 처음 들어왔을 때 한 선배님이 저한테 어린모라는 별명을 붙여주셨어요. 처음엔 대학원생처럼 풋풋한 ‘어린모’였는데 이제는 세월을 먹고 자라 언니들 먹여 살리는 ‘벼’같은 사람이 되었다고 농반진반 말씀하세요. 저 역시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여전히 노력중이랍니다. -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은?인생을 살다보면 누구나 어려움에 봉착할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왜 나만 이리 힘들까 생각하기보다 ‘첫째, 어려움은 지나가는 것이다. 둘째, 내려가면 올라갈 일만 남았다’는 긍정의 마음으로 열심히 노력했으면 해요. 그러다보면 방법도 생기고 도와주는 사람도 생기더라고요. 또 어려움이 없을 때는 자만하지 말고 평소에 기도로써 저축하시길 바랍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해라! 범사에 감사하라!" 는 성경 말씀처럼 일상을 ‘기쁨’과 ‘기도’와 ‘감사’로 채우다보면 여러분의 삶이 저절로 충만해짐을 느낄 거예요. 글_김효정 이화해피펀드 장학생의 핀란드 교환학생 체험기 작성자 대외협력처 기부자명 정승은 장학생(사회교육 16학번) 첨부파일 0 작성일 2019-09-26 조회 1313 이화해피펀드는 재학생들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꿈을 향해 나갈 수 있도록 응원하는 학생복지기금입니다. 이화해피펀드에 많은 이화인들이 동참해주신 덕분에 지난 2018학년도 2학기에 재학생 2명이 항공료와 현지생활비 1.000만 원을 이화해피펀드에서 지원받아 미국과 핀란드에 교환학생으로 다녀왔습니다. 멋진 교사를 꿈꾸며 공교육의 나라, 핀란드를 다녀온 정승은 장학생! 그녀의 교환학생 체험기를 소개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화여자대학교 사회교육과에 재학 중인 16학번 정승은입니다. 저는 지난 3학년 2학기, 6개월 동안 핀란드의 투르크(Turku)라는 도시에서 교환학생 생활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감사하게도 이화여자대학교 해피펀드 장학금을 받아 사범대학생으로서 꿈꾸던 교육의 나라, 핀란드에서 한 학기를 값진 경험들로 가득 채워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저는 공교육에서 질 높은 교육의 접근성을 높이고 평등이라는 가치를 실현시키는 교사이자 교육정책가가 되고 싶습니다. 핀란드 교환을 지원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이러한 가치들이 잘 반영된 공교육시스템을 직접 경험하고, 예비교사로서 제 스스로의 교육관을 정립함과 더불어 한국의 공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만들고 싶어서였습니다. 핀란드에서의 한 학기는 이러한 제 학업적 호기심을 여러 방면에서 채워준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핀란드의 “Flexible Study Rights”를 통해 두 학교에서 수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핀란드는 스웨덴어를 사용하는 소수 민족, 핀란드 북부지역에 사는 사미족과 핀란드어를 사용하는 대다수의 국민들로 이루어져있는데, 저는 스웨덴어를 사용하는 오보 아카데미 대학교(Abo Akademi University)와 핀란드어를 사용하는 투르크 대학교(Turku University)에서 수학했습니다. 두 학교에서 공부한 경험은 핀란드를 더욱 깊게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투르크 대학교에서는 주로 핀란드의 교육을 알아볼 수 있는 수업을 위주로 들었습니다. “The Finnish Education System”이라는 과목을 수강하며 핀란드의 교육시스템이 형성된 배경을 이해하고, 현지 학교 다섯 곳을 방문학습(School Visit)하며 교육현장에서 교육시스템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볼 수 있었습니다. 제가 본 핀란드 교육시스템의 근간에는 각 학생의 필요한 정도에 따라 자기계발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어야 한다는 “형평성(Equity)”이 뿌리 깊게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다양성(Diversity)을 인정하는 환경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을 각 교실에 배치된 일반의자, 빈백, 회전의자 등 여러 종류의 의자들로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나아가, “Intercultural Team Building”과 “Multicultural Education”이라는 과목을 통해 다양한 문화적 배경의 학생들과 교류하며 학생들이 “다름”에서 배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교사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다른 문화의 학생들과 여러 주제에 대한 다방면의 이야기를 나누며 생각과 행동의 차이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교사는 이러한 차이들을 어떻게 풍부한 학습 환경으로 이끌어야할지 그 교육적 방안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보 아카데미 대학교에서는 이러한 교육시스템의 기반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는 핀란드 및 북유럽의 민주주의와 복지 시스템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수업을 들었습니다. 한 교수님의 설명 중에 북유럽의 공고한 사회안전제도를 잘 반영하는 인상 깊었던 표현이 있었는데 바로 “Happy Taxpayers”입니다. 높은 비율의 세금을 내지만 비교적 투명하게 내가 낸 세금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알 수 있고, 그 세금의 사용처가 교육과 복지 등 사회안전망을 든든히 하는데 많은 국민들이 동의하는 구조를 보며 민주주의와 사회의 다양한 부분의 밀접한 연관성을 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사회의 소수집단에 대한 태도와 시각을 연구하는 수업을 들으며 세계 곳곳의 사례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었습니다. 학업적 측면 외에도, 핀란드 교환 생활 중에 다양한 새로운 친구들을 많이 사귀어 즐겁게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오보 아카데미의 “튜터 프로그램”을 통해 만난 핀란드 친구와 6명의 다른 교환학생들과 한 학기동안 한 그룹이 되어 여러 문화교류 활동을 했습니다. 도시를 돌아다니며 퀘스트를 하는 metsästäjä부터 겨울에는 핀란드 겨울음료인 Glögi를 마시며 핀란드의 문화체험을 함께 하기도 하고, 서로의 집에 초대해 각자 나라의 음식을 만들어서 파티를 하는 포트럭 파티도 자주 열었습니다. 또, 수업에서 친해진 친구들과는 근교 여행을 다니며 핀란드의 진면목을 함께 찾아다녔습니다. 가을에는 투르크 국립공원에 가서 버섯따기 체험도 하고, 겨울에는 라플란드에 가서 오로라를 함께 보기도 했습니다. 두 시간 거리인 헬싱키를 비롯한 핀란드의 여러 도시들에 당일치기 여행을 다녀오며 핀란드의 색다른 모습들을 함께 공유했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친구들과 여행을 다니며 가장 좋았던 점은 대화를 많이 나눌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같은 외국인 교환학생으로서 핀란드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있었고, 또 공공외교관이 되어 한국을 소개하는 입장일 때도 있었으며, 23살 청춘으로서 비슷한 고민을 나누거나 실없는 농담을 나눌 때도 있었습니다. 그 모든 순간들이 모여 제 생각의 지평이 많이 넓어졌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렇듯 대화를 나누며 친해진 친구의 추천으로 2년마다 노르웨이의 트론하임(Trondheim)에서 개최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국제학생 학술축제를 알게 되었고, 감사하게도 ‘ISFIT(International Student Festival in Trondheim) 2019’에 전액 장학생이자 한국대표로 참가할 기회를 받았습니다. ‘이주(Migration)’이라는 큰 주제에 대해 10일 동안 노벨 평화상 수상자를 비롯한 전 세계 석학 분들의 강연을 듣고, 다양한 장르의 문화공연을 관람하며, 전 세계에서 모인 500명의 학생들과 토론하는 등 하루하루가 학술, 문화교류, 네트워크 빌딩이 총집합된 축제의 장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저는 다른 참가자들과 대화했던 순간들이 가장 기억에 남는데, 그건 미디어나 책 등 어디서도 접할 수 없는, 대화로서만 가능한 그 나라에 살고 있는 친구들의 경험에서 비롯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노르웨이의 학술축제를 통해 많은 귀중한 경험을 얻었지만, 그중에서도 저만의 교육관을 하나 더 정립할 수 있었던 것이 가장 뜻깊었습니다. 바로, 학생들이 서로를 존중하는 범위 안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안전한 공간, 대화를 통해 서로 배울 수 있는 교육환경을 만드는 교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에 돌아온 지금의 저는 예전보다 꿈이 많아졌습니다. 6개월 동안 핀란드 교환생활을 통해 제가 꿈꾸었던 교육자의 모습에, 한국 교육의 모습에 더 많은 빈칸들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지난 6개월 간 배웠던 모든 것을 온전히 담아 앞으로 이 빈칸들을 채워나갈 때 유용하게 꺼내 쓰며, 새로운 도전들을 설레는 마음으로 해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 인생에 전환점이 된 핀란드 교환생활을 가능하게 해주신 이화여자대학교 장학 관계자분들과 보다 많은 학생들에게 이런 선물 같은 기회를 주시는 해피펀드 후원 가족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받은 나눔의 손길을 항상 잊지 않고, 제가 큰 선물을 받은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이화인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더 넓은 세상을 선물합니다 작성자 대외협력처 기부자명 김미경 동문(특교 86졸) 첨부파일 0 작성일 2019-07-30 조회 1708 김미경 동문(특교 86졸)이 특교86김미경장학금 1,000만원을 후원했다. 졸업 후 한 번도 모교와 접속한 일이 없다는 그녀는 ‘열심히 공부하지만 형편이 덜 어려운’ 특수교육과 1명과 영어교육과 1명을 선발해 해외 어학연수를 다녀올 수 있도록 후원하고 싶다고 했다. 심지어 항공료를 걱정하는 장학생 한명에게는 흔쾌히 항공료 100만원을 추가 지원하기도 했다. 후배들에게 더 넓은 세상을 선물하고 싶다는 김 동문을 이메일로 만나봤다. - 누구나 여유가 생기면 후원하겠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실천하기는 쉽지 않은데요, 학교 후배들을 위해서 장학금을 후원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평소 저희 부부는 남을 도우면서 살자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삼남매를 어느 정도 키워 놓고 나서부터는 조금씩 실천해 보기로 했습니다. 사실, 10여 년 전부터 몇몇 기관에 기부를 해왔으나, 그 기관에서 우리의 의도와 일치하게 활용하는가에 대한 아쉬움이 들었어요. 시아버님께서 생전에 장학재단을 설립하여 열심히 공부하는 어려운 학생들을 돕겠다는 꿈이 있으셨는데 일찍 운명하시면서 실천을 못하신 것이 있어 저희 부부가 직접 장학재단 설립을 알아보기도 했는데요, 개인이 장학재단을 설립하기에는 과정도 복잡하고 규정도 많아 포기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모교에 장학금을 후원하면 보다 쉽게 후배들을 도울 수 있겠다는 생각에 기부를 결심하게 됐어요. - 보통 장학기금은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으로 쓰이길 원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특별히 장학금을 해외연수비로 써달라고 하신 이유가 있으신가요?장학금은 보통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지급되는 경우가 많아서, ‘열심히 공부하지만 형편이 어렵지 않은’ 범주의 학생들이 오히려 장학금을 받기 어렵지 않나요? 제가 대학생이었을 때도 그랬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사실, 저희 7남매 중 4명이 모두 대학생이어서 부모님께서 힘들어 하셨는데, 대학생 과외 아르바이트도 법적으로 금지됐던 시절인데다 일반 아르바이트(당시에는 편의점도 없는 등 아르바이트 업종 자체가 드믈 때!) 자리는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이 우선이라 저희 형제들은 부모님을 금전적으로 도와드릴 방법이 거의 없었어요. 그러다 제가 4학년 2학기 때 성적우수자에게 주는 이화장학금을 받게 됐는데, 이 소식에 너무나 기뻐하셨던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아마 일생동안 부모님으로부터 받았던 칭찬 중에서 가장 큰 칭찬을 그때 받지 않았나 싶네요(^^).요즘도 저와 같은 경우가 많지 않을까 싶었어요. 학비는 어찌어찌 해결하더라도 남들 다가는 어학연수 비용은 감당하기 어려운 틈새에 놓인 후배들이 있을 거라고요. 그들에게 더 큰 세상을 보여주고 생존 수단인 영어를 현지 유수의 교육 기관에서 배울 수 있는 어학연수 기회를 지원해 주는 일이 가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이번에 선생님의 후원을 받아 특수교육과 1명과 영어교육과 1명을 선발하여 여름방학 때 아일랜드와 캐나다에 어학연수를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이들 장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은? 하하, 제가 전하고 싶은 말을 전달 부탁드려도 될까요? 국내에서만 받아 온 교육 방법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느꼈으리라 생각해요. 교육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온 각기 다른 나라의 학생들의 겉모습과 행동, 생각이 참으로 다양하다는 것도 배웠을 거고요. 서양인들이 우리나라 학생들보다 일찍 성숙해지고 부모로부터 심리적 경제적으로 일찍 독립하는 면도 눈에 보였을 테고 저희보다 왜 선진국민이라는 말을 듣는지도 알게 됐을 거예요. 그렇다고 그들이 우리나라 학생들보다 전적으로 우월하다는 뜻은 아니고요, 그들의 장점은 받아들이면서 우리의 장점을 살려서 자신을 변화시키고 좀 더 발전한다면, 그리고 영어 실력이 향상되었다면, 그래서 사회에서 좀 더 자신감을 가지고 도전할 수 있다면 저의 소기의 목표는 이루어졌다고 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요즘 너무 많은 초·중·고교 학생들은 공통적으로 꿈이 없어요. 아마도, 지나친 경쟁으로 인해서 감히 용기를 낼 힘이 없어서인 것인지, 주변에 롤 모델이 될 만한 어른을 찾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절박하게 배고픈 적이 없어서 노력해야 한다는 의욕 자체가 없는 것인지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앞으로 교사가 되어 학생들 지도할 때 직접 경험한 해외의 더 넓은 세상을 전달해 주어 미래세대가 더 큰 꿈을 꾸도록 지도하는 교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 특수교육과와 영어교육과 이 두 과의 후배들에게 장학금을 후원하시게 된 동기가 있으신가요?두 과 모두 제가 감사와 애정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수교육을 전공했고 영어교육을 부전공했는데 제게 매우 잘 맞는 분야여서 자부심이 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6학년부터 중학교 2학년까지 해외 근무하는 부모님을 따라 멕시코시티와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모국인 수준에 근접하는 영어 실력을 갖추게 되었어요. 어린 시절에 선진국에서 이미 특수교육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했고, 아버지께서는 제가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하니, 우리나라도 특수교육이 유망해질 거고 성격도 맞을 거라고 권유하셔서 특수교육을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이미 본토에서 익힌 영어 실력 또한 잃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해 부전공으로 영어교육을 선택하게 되었고요. 결혼 후 공부하는 남편을 따라 포항에서 큰 아들, 군산에서 둘째 아들, 그리고 포스트닥터로 미국에서 지낼 때 막내인 딸을 출산하여 3남매를 모두 연고 없는 곳에서 키우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포스트닥터일 때랑 교수 안식년일 때 미국의 공립 초·중·고교의 ESL 학급 시간제 도우미를 하면서 다양하게 발전하는 영어교육 현장 경험도 했지요. 군산에서 90년대 중반부터 제 아이들을 위해 시작한 영어지도를 하고 있는데요, 시작 당시 군산에서는 특수교육 교수법을 가미한 선도적인 영어 교수법으로 열악했던 영어회화 분야에 영향력을 끼친데 대해 제 나름대로 큰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특수교육과 영어교육에서 배운 지식과 경험이 저의 인생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듯이, 이 두 분야를 전공한 후배들이 좀 더 넓은 시야와 탄탄한 실력을 가진 교사로 성장할 수 있도록 응원하고자 함입니다. - 나에게 이화란? 늘 그리운 곳입니다. 제 인생에 있어서 가장 꿈이 크고 에너지가 넘쳤을 때, 활동적으로 다닌 대학교입니다. 1학년 입학하자마자 과 부대표로 뽑혀서 열심히 뛰어 다녔어요. 1학년 2학기부터 3학년 1학기까지 과대표로, 그 후 졸업할 때까지는 특수교육학회 학생 간부로 늘 뛰어 다녔습니다. 졸업 이후엔 가보고 싶어도, 때로는 대학원이이나 평생교육원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도 늘 있었지만, 서울을 떠나 삼남매 키우며 살림하며 일까지 하면서는 모교 방문 자체가 힘들어서 잘 못 가는 곳이니까요. - 기부에 대한 나름의 소신이 있으신가요? 기부를 하면 할수록 내가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게 돌아오는 것이 다양하고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이 생각을 깨닫게 된 계기가 있어요. 대학교수로 임용된 남편을 따라 연고도 없는 군산에서 혼자 3남매를 키우면서 일하는 것 자체가 벅차고 힘들다 보니, 제 가족도 건사하기 힘든데 밖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것은 스스로 위선이라고 생각하며 그저 아이들 학교 봉사활동만 겨우 시간 내어 최소한으로만 하던 때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가 운영하는 영어교습소에 월드비전에서 전화가 왔어요. 월드비전 소속 어린이들에게 영어교육 봉사를 해줄 수 있냐는 전화였죠. 당시 이 지역에서는 어린이 기초 영어 교육의 체계가 덜 잡혔을 때라 제가 특히 기초교육에 전문화된 어린이 영어지도를 한다는 것을 수소문 끝에 알게 되어 연락했다고 했습니다. 살짝 고민은 됐지만, '아, 이번 기회를 통해서 내가 가장 자신 있는 것으로 좋은 일 한 번 해봐야겠다!'라는 생각이 스쳐서 바로 하겠다고 응했지요. 그리고 딱 1년 간 성실히 지도를 했는데, 1년 후에 봉사로 인한 놀라운 축복을 체험하면서 확실히 깨닫게 되었어요. ‘내가 남들보다 조금 더 갖고 있는 것을 조건 없이 선의로 베풀면 그에 대한 축복이 반드시 오는구나!’라고요. 그리고 그 선한 도움은 선하게 잘 전달되어 향기로 퍼져 나가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또 그 선한 향기를 퍼뜨릴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 후배들에게 선배로서 꼭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듣고 싶습니다. 요즘의 후배들은 저희 때에 비하여 훨씬 다양하고 깊게 공부하고 있고, 또 해야만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화의 후배들은 스스로 잘 알아서 해내는 학생들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고요. 많은 인구수에 비해 비좁은 국토에 밀집되어 살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경쟁이 매우 심하여 때로는 지치기도 하고 시야가 좁아질 수 있을 것입니다만, 자신의 성장을 위해서 젊은 시절에 흘리는 땀은 매우 값지게 되돌아 올 것임을 믿고, 좌절하지 말고 더욱 더 매진해 주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나날이 열악해지고 있는 공해, 토양 및 해양오염, 스트레스 등으로 인해 질병도 많아지고 있어요.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다시 한 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은 무엇보다 자신의 신체가 건강하여야 하고, 신체가 건강하면 정신도 건강해지는 바, 자신의 몸을 좀 더 사랑하고 소중히 대할 줄 아는 지혜로운 여성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선한 향기와 품격을 지닌 자랑스러운 이화인으로 성장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함께 안아 흐르는 물처럼 더 너른 이화로 작성자 대외협력처 기부자명 남상택 총동창회장(물리 74졸) 첨부파일 0 작성일 2019-07-25 조회 1413 남상택 동문(물리 74졸)이 2019년 3월 9일(토) 이화여자대학교 총동창회 정기총회에서 제18대 신임 총동창회장으로 선임됐다. 남상택 동문은 1974년 본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1984년부터 2005년까지 모교 물리학과 강사로 활동했다. 자연과학대학 동창회장과 총동창회 감사, 진명여고 총동창회장, (재)진명100주년장학재단 이사장을 역임하였고, 이화여자대학교 물리학과 선정 ‘자랑스러운 물리학과 동문상’(2015년)을 수상한 바 있다. - 제18대 총동창회장님이 되신 소감을 말씀해 주십시오.솔직히 어깨가 무겁습니다. 23만 명 이화동창을 대표하는 자리이니만큼 막중한 책임감을 느낍니다. 저는 동창회의 여러 직책들을 맡아보면서 총동창회장이라는 직함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가를 깊이 느끼고 있습니다. 명예보다는 시간과 에너지를 다 바쳐 헌신과 소명으로 일하는 자리라는 것을요. 그래서 제가 극구 “감당하기 어려운 자리”라고 고사를 했더니 선배님들께서 “죽었다 생각하고 하세요.”라고 말씀하시는 바람에 꼼작 없이 중책을 맡게 되었죠.(웃음) 다행히 많은 분들의 기도와 응원 덕분에 무사히 적응해 가고 있습니다. 이화여대 총동창회가 많은 분들의 사랑과 열정의 결실임을 기억하며, 겸허한 마음으로 총동창회의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자 합니다. - 총동창회장님께 이화는 어떤 의미인가요?저에게 이화는 ‘숲이 우거진 큰 산’입니다. 물리학과 학부와 석사를 거쳐 강사생활을 20여년 하면서 캠퍼스의 변화를 지켜봤죠. 학생문화관 자리에 있던 구 건물에서 현재 자연과학대학 건물로 이사할 때는 물리학과 실험기구 등 이삿짐을 싸고 나르기도 했어요. 이화는 제 영혼의 큰 산과도 같습니다. 숲속을 거닐다가 소중한 열매를 얻듯이 이화라는 깊고 푸른 숲속에서 삶을 지탱할 지식과 경험을 얻었으니까요. 넉넉하고 풍요로운 이화 품안에서 배울 수 있었던 것은 큰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 학창시절에 가장 생각나는 추억이 있으시다면?저는 1970년에 입학했는데 그때는 대학가에 시위가 이어져 휴교를 많이 했어요. 정의감이 넘치던 시절이라 그랬는지 나름 진리에 대한 갈증이 컸습니다. 물리학도였지만 인문학, 특히 철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서 철학수업 때 맨 앞줄에 앉아 공부할 정도로 열심이었답니다. 그때 깨알같이 필기했던 철학개론 스프링 노트를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어요. 그러고 보니 요즘 유행하는 통섭과 융합을 제가 좀 일찍 실천한 셈이네요. 그 당시 인간답게 살기 위한 탐구로 이어진 철학 공부는 지금까지도 제 인생의 든든한 자양분이 되고 있습니다. - 임기 동안 총동창회장으로서 추진하고 싶은 사업 방향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총동창회는 매년 5월 31일 창립기념일에 ‘졸업 30주년·50주년 동창 재상봉 행사’와 ‘올해의 이화인’ 추대, ‘빛나는 이화인’상 시상을 진행하고 있고, 5월에 이화가족 어린이 그림그리기 대회, 9월에 총동창회 대 바자회, 11월에 ‘이화인의 밤’ 개최와 ‘아름다운 이화인’상 시상 등 시기별로 굵직한 동창 행사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이화인’상은 우리 사회에 소외된 이웃을 위해 섬김과 나눔의 이화정신을 실천하고 있는 동창에게 수여하는 상인데요, 동창들의 추천을 받아 시상하고 있습니다. 오는 8월 30일까지 ‘아름다운 이화인’을 추천받고 있으니 동창 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이러한 기존 사업과는 별도로 제18대 동창회에서는 두 가지 새로운 사업을 추진할 계획입니다. 먼저 올해 하반기에 ‘올해의 이화인’ 기수별 연합 모임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총동창회가 1991년부터 추대하기 시작한 ‘올해의 이화인’이 이제 1,000명을 넘어섰습니다. 매년 졸업 30주년이 되는 동창 중에서 과에서 1명씩 추대하는 ‘올해의 이화인’은 기수별로는 결속력이 강한 데 반해 전체 동창 네트워크로는 성장하지 못했어요. 전체 ‘올해의 이화인’ 간의 만남을 통해 동창회로서의 기능을 강화하고 싶습니다. 두 번째는 졸업 50주년 이상의 동문 초청 행사입니다.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면서 졸업 50주년을 맞는 동창들의 참여가 해마다 늘고 있습니다. 졸업 50주년 이상인 분들을 모두 초청해 이분들의 참여 기회를 확대하고자 합니다. - 솔직히 젊은 동창들은 총동창회에 대한 거리감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젊은 동창들의 참여 폭을 넓히기 위한 방안이 있으신가요?사회의 패러다임은 급변하고 있기에 동창회도 새로운 변화가 필요합니다. 일례로 올해 ‘올해의 이화인’을 추대하는 과정에서도 동창들이 ‘똑같은 한복을 꼭 입어야하냐’면서 이전과 다른 변화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 이화만의 고유한 전통도 살리면서 젊은 세대의 변화 요구도 발전적으로 수용해야하는 시점입니다. 앞으로 젊은 동창들의 참여 확대를 위해 자녀교육, 유산상속, 건강세미나, 전문직 동창소개 등 젊은 동창들에게 유익한 특강 프로그램을 개발할 예정입니다. 또한 총동창회 홈페이지(www.ewhaalum.or.kr)와 SNS 등 네트워킹 활성화를 통해 보다 친근한 총동창회를 만들어나갈 생각입니다. 총동창회를 선배들의 연륜과 지혜, 젊은 동창들의 열정과 에너지가 함께 소통할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 만들어 나가겠습니다. - 나중에 임기가 끝나고서 어떤 총동창회장으로 기억되고 싶으신지요?어려운 질문이네요.(웃음) 솔직히 어떻게 기억되고 싶다는 생각은 주제넘은 듯 하구요, 그저 임기 후에 부끄럽지 않은 총동창회장이 되고 싶습니다. 항상 나중을 생각하면서 오늘도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총동창회장님의 인생 모토가 있으신가요?‘물처럼 살자’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직책을 맡아 힘들어할 때 한 선배님이 그러셨어요. 물처럼 거스르지 말고 아래로 흐르듯 살라고. 그때부터 제 좌우명이 됐어요.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만 흐르면서, 작은 돌을 만나면 돌아가기도 하고, 큰 바위를 만나면 용기 있게 힘껏 부딪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저런 물을 가리지 않고 함께 안아 흐릅니다. 그러나 줄기차게 흘러 결국 너른 바다에 이르는 것이 바로 물입니다. 물과 같은 겸손과 포용력으로 동창 여러분들과 함께 더 큰 이화로 나아가고 싶습니다. 노력하면서 가다보면 우리 이화만의 블루오션이 열리지 않을까요? - 총동창회는 지금까지 학교 발전의 중요한 파트너로서 이화와 함께 성장해 왔습니다. 학교 발전을 위해 총동창회장님께서 하고 싶은 일이 있으신가요?총동창회 회칙에 ‘모교의 발전에 적극 기여하며 회원 상호간에 친목을 목적으로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1908년에 발족되어 111년의 시간동안 모교와 동창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하면서 이화의 발전을 위해 노력해 왔다고 자부합니다. 매년 모교에 학교발전기금과 이대총동창회장학금을 후원하고 있으며, ECC나 기숙사 건축 등 각종 학교사업에 총동창회가 열심히 학교를 도와 모금사업을 해왔습니다. 모교의 발전이 곧 이화동창의 발전이고 이화동창의 발전이 모교의 발전이라는 생각으로 앞으로도 긴밀히 소통하고 협력하면서 모교의 발전을 위해 힘쓰겠습니다. - 이화 졸업생이라면 누구나 총동창회에 가입할 수 있나요?학부와 대학원 졸업생이면 모두 총동창회의 정회원이 됩니다. 정회원은 의결권과 선거권, 피선거권을 가지며 회비부담과 회칙준수의 의무가 있습니다. 연회비는 3만원이고 평생회비는 50만원(60세 이상은 30만원)입니다. 연회비는 동창회보 발간, 모교 기부금, 장학금 등에 요긴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특히 지방 및 해외에서도 정회원이 30인 이상 되면 소정의 절차를 거쳐 지회를 설치할 수 있기 때문에 세계 어디서든 이화여대 총동창회와 함께 하실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시다면?총동창회 문은 항상 이화동창 여러분을 향해 활짝 열려 있습니다. 이화·삼성교육문화관 8층에 사무실이 있으니 편하게 찾아주시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다양한 동창서비스와 동창회보도 만나실 수 있습니다. 앞으로 총동창회는 먼 미래를 생각하는 혜안으로 나아가는 길에 걸림돌이 있다면 꼭 필요한 디딤돌로 다시 바꿔 가면서 굳건히 걸어가겠습니다. 이화동창 여러분과 함께 더 큰 이화를 향해 나아가고 싶습니다. ‘이화’의 이름이 있는 곳 어디에서나, 밀알처럼 때로는 보석같이 빛나는 이화동창들을 많이 만나게 되고, 함께 기뻐하며 축하하는 자리가 끝없이 이어지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글_김효정 알프스에서 울려 퍼지는 나눔 메아리 작성자 대외협력처 기부자명 마희자 ALPS동창회 회장 첨부파일 0 작성일 2019-07-09 조회 1034 ALPS는 1995년에 설립된 이화여대 정책과학대학원 여성최고지도자과정이다. ALPS 3기로 입학하여 수료한 지 23년, 인생의 삼분의 일을 ALPS와 함께한 마희자 회장은 ALPS를 ‘알프스’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자신의 이야기보다 ALPS 동문들에 대한 자랑으로 들떴다. 마치 자식 자랑하는 엄마처럼 ALPS와 함께 배우고 나누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인터뷰 내내 유쾌하게 고백했다. 투게더, 함께하면 가능한 기적올해 ALPS동창회 회장에 선출된 마희자 회장은 다양한 문화행사를 기획하여 이화여대 여성최고지도자과정(Advanced Leadership Program Society) 활성화에 기여한 이화 ALPS의 산증인이다. 그런데 마 회장은 오히려 ALPS에 와서 ‘여성 봉사정신’에 눈을 떴다고 고백했다. 이화 재학생들을 위해 기획하게 된 ALPS 기증바자회만 해도 전적으로 회원 기증으로 진행하면서 몇 달을 준비해야 하는 수고스러운 일이다. 올해로 벌써 19회를 맞이한 이 기증바자회를 통해 지난 18년 동안 장학금으로 기부한 금액이 8억원가량 된다. “저 혼자였다면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겠어요. 함께할 사람들이 내 주위에 많이 있다는 걸 ALPS가 깨닫게 해주었죠. 같이 가는 ‘투게더’ 정신이요. 작은 힘이 모여서 큰 힘을 만들어내는 곳이 바로 ALPS입니다.” 마희자에게 물어보세요올해 마 회장이 기획한 ALPS 주최 자선패션쇼는 기부자가 직접 패션쇼 모델로 서는 독특한 콘셉트의 패션쇼이다. 패션에 관심 있는 여성들의 취향을 나눔과 연결한 것이다. 마 회장은 특히 ALPS 합창단의 활동을 강조했다. 결식아동·유방암 환자·루프스 환자·미혼모 돕기 등 국내 자선음악회뿐만 아니라 해외 교민 및 아프리카·캄보디아 돕기 등 해외 활동까지, ALPS 합창단은 국내외를 누비며 나눔의 노래를 부른다. ALPS는 이화를 위해서도 각종 장 학기금 및 건축기금을 지속적으로 기부해왔다. “솔직히 자선패션쇼 티켓 한 장 팔기도 힘들어요. 그런데 ALPS 동문들은 나눔과 봉사라면 기꺼이 동참하죠. 오히려 이 정도밖에 못하는 걸 부끄러워해요. 천국에 갔을 때 착한 일 뭐 했냐고 물으면 ‘저는 기부하라고 시키는 대로 내서 잘 몰라요, 마희자한테 물어보세요’라고 대답할 거라고 우스갯소리들을 해요. 이렇게 순수한 분들과 함께한다는 것이 저에게는 굉장한 힘이자 큰 행복이에요.” ‘여성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향한 꿈개인적으로도 꾸준히 이화를 후원해온 마 회장은 2018년 12월 이화미래전략기금으로 3천만원을 후원하면서 1억원 이상 후원한 기부자 모임인 아너스클럽 회원이 되었다. “ALPS에서 배운 나눔을 개인적으로도 실천하는 것뿐이에요. ALPS에서 급변하는 사회에 대한 지식과 통찰을 배웠고, 내가 서있는 자리에 대한 사회적 책임감을 깨닫게 되었죠. 지인들에게 이화 ALPS 하자고 권하는데 요즘엔 아너스클럽 하라고 추천 목록이 하나 더 늘었답니다.” 이토록 이화 ALPS에 대한 깊은 애정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마 회장의 바람은 무엇일까? “ALPS가 더 활성화되어서 ‘여성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더욱 앞장서 실천하며 더 많은 여성들을 후원하게 되었으면 합니다.” 그의 진달래빛 재킷 앞섶에 달린 하얀 배꽃 브로치가 이화 ALPS에 대한 마 회장의 사랑을 상징하듯 환하게 빛나 보였다. 한 걸음 한 걸음 길을 만든다 작성자 대외협력처 기부자명 김순옥 정책과학대학원 동창회장 첨부파일 0 작성일 2019-07-09 조회 1273 인터뷰 말미, 앞으로의 꿈이 있냐고 물었다. “제가 사실 체력이 옛날 같진 않아요. 그래도 우리 여성들의 능력을 제대로 펼 수 있는 환경과 시스템을 만드는 데 남은 힘을 보태고 싶어요” 여성을 위한 그녀의 연대의식은 참으로 크고 넓다. 김 회장이 일구어낼 정책과학대학원 동창회의 변화가 자못 기대되는 이유다. 여성 CEO의 이정표를 만들다김순옥 동문(정책과학과 석사 19졸)은 우리나라 여성 CEO 1세대이자 여성정책 변천사의 산증인이다. 복사와 커피 심부름이 여성의 주업무였던 1970년 중반, 외국상사에서 선진화된 시스템과 비즈니스를 배운 그는 1980년에 텍스타일디자인 회사를 창업했다. 오늘날 중견 자동자부품업체의 대표가 되기까지 40년 동안 여성 CEO의 길을 걸어온 것이다. 80년대는 여자가, 그것도 결혼도 안 한 서른살 미혼여성이 사업을 한다는 건 엄두도 못 내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여자가 사업한다고 하면 무조건 남편의 보증을 요구했어요. 여성이 진출할 수 있는 분야도 극히 제한적이었고, 앞서 나간 선배들도 없었고요.” 그녀는 스스로 길을 만들기로 했다. “여성 CEO 기업은 환경적으로나 규모면에서나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여성기업을 위한 정책 수립이 절실했어요” 김 회장은 한국여성경영자총협회(이하 여경총)의 창립 멤버이자 제7대~10대 회장으로 9년간 여경총을 이끌며 여성기업을 위한 정책 제안에 발 벗고 나섰다. 지금 우리가 당연히 누리고 있는 많은 여성기업 정책들의 상당수가 여성경제인협회들의 작품이다. “일단 저를 위해서 열심히 뛰었고요, 후배 CEO들을 위해 이정표 하나 찍고 간다는 생각으로 열정을 쏟았어요. 금방은 안되더라도 제 안이 하나하나 정책으로 실현되면서 여성들의 지위와 권익이 조금씩 향상되는 것이 정말 보람 있고 즐거웠거든요.”여성 리더들의 필수 관문은?정책과학대학원 졸업과 동시에 정책과학대학원 동창회장을 맡은 김순옥 회장. 2018 년 12월에는 정책과학대학원발전기금 5천만원을 기부해 1억원 이상 고액 기부자 클럽인 이화아너스클럽에 가입했다. “후원하게 된 계기는 단순해요. 첫째는 이화에 대한 사랑이고요, 둘째는 정책과학대학원이 능력 있는 여성리더를 더 많이 키워줬으면 하는 마음이죠.” 우리나라 기업의 여성 임원 비율은 OECD 국가 중에서 꼴찌다. 여성임원 할당제를 제안하면, 관계 부처나 기업들은 임원 역할을 감당할 전문 여성리더가 없다며 난색을 표한다고. 그래서 김 회장은 “우리 여성들이 리더가 되려면 그 자리를 감당할 능력을 스스로 갖춰야 한다”면서 “이화여대 정책과학대학원이 임원급 리더가 되고 싶은 여성들이 꼭 거쳐 가야 할 관문”이라고 강조했다. 정책과학대학원 동창회장으로서의 자부심도 남다르다. “정책과학대학원이 올해로 21주년이 돼요. 다양한 분야에서 훌륭한 동창들을 많이 배출했지만 아직 동창회 조직은 미약한 편이에요. 기업 현장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선배들이 어느 분야, 어느 기업에 있는지 정도는 알 수 있도록 네트워킹에 힘쓰려고요” 선배가 후배를 이끌어주는 여성리더들의 동창회를 만들고 싶다는 그녀. 40여 년에 걸쳐 제안하고 부딪치고 관철시키며 스텝 바이 스텝으로 현실 을 변화시켜온 김 회장다운 다짐이어서 더욱 신뢰가 간다. 어머니 통장에 담긴 100년의 스토리 작성자 대외협력처 기부자명 곽삼근 교육학과 명예교수 첨부파일 0 작성일 2019-07-09 조회 1431 “모든 기부에는 스토리가 있죠.” 촬영 중간, 곽삼근 교수가 읊조리듯 말했다. 2018년 5월, 곽 교수는 이화미래전략기금 1억원을 약정했다. 그 1억원에는 남다른 100년의 스토리가 담겨 있다. 할아버지에게서 어머니에게로, 어머니에게서 그에게로, 삶으로 감응한 100년의 기부 스토리. 여운은 묵직했지만 곽 교수의 눈빛은 밝고 목소리는 생기 넘쳤다.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 뿜어내는 환한 에너지였다. 나의 할아버지, 나의 어머니2017년 8월 작고하신 어머니가 남기신 통장에서 곽 교수의 기부 스토리는 시작한다. 곽 교수의 조부는 독립운동가 곽대용 선생이다. 옥고의 후유증으로 해방 이듬해 돌아가셨고 매달 독립유공자 후손연금을 어머니가 받으셨다. 그런데 그 돈을 사사로이 쓸 수 없다는 어머니의 신념 하에 적지 않은 금액이 모아져 있었다. “통장은 제 관할은 아니었지만 ‘사회 환원’이라는 큰 정신적 유산을 받은 셈이지요.” 할아버지가 훌륭하게 사셔서 받은 것이니 우리 사회를 위해 써야 한다는 어머니의 유지는 곽 교수의 마음에 지진을 일으켰다. “7남매를 키우면서 엄마도 돈이 아쉬울 때도 많으셨을 텐데 시아버지의 뜻을 기리며 차곡차곡 쌓아온 어머니의 삶의 흔적이 커다랗게 다가왔어요. 어머니 1주기 되기 전에 엄마가 할아버지를 기렸던 마음처럼 제가 이화에서 받은 사랑에 보답하고자 이화의 발전을 위해 기부하겠다고 결심했지요.”‘좋은 삶’을 꿈꾼다는 것여성평생교육학자 1세대로서 여성주의와 평생교육 분야에서 선도적 연구를 해온 곽 교수가 도달한 결론은 진학과 취직을 위한 교과 중심적 공부가 아니라 배운 지식을 토대로 사회에서 좋은 삶을 살아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교육의 진정한 목적이라는 것이다. “특히 이십대에는 많은 책을 읽으면서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살았나를 간접 체험하며 길잡이로 삼았으면 좋 겠어요.” 곽 교수가 이대 교육학과에 입학하게 된 계기도 한 권의 책이었다. 의사 아버지를 따 라 의대 진학을 목표로 공부하던 중, 고3 때 김활란 자서전을 읽고 ‘여성교육’에 눈을 뜨게 됐 고, 이과에서 문과로 전과를 감행하며 이화여대 교육학과에 입학했다. 이화인을 위한 책 추 천을 청하자 곽 교수는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을 꼽았다. 인간의 활동을 노동, 작업, 행 위의 세 차원으로 구분하는 한나 아렌트의 관점에서 자기 존재가치를 발휘하며 살면 좋겠다 며 곽 교수는 “강추!”했다. 자기 안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발휘하길곽 교수는 이화의 미래교육이 나아갈 바를 ‘인간미’에서 찾았다.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의 차별점이자 강점은 결국 ‘가장 사람다운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것은 마음, 정신, 가치의 영역이지요. 같은 맥락에서 저는 이화가 갖고 있는 저력은 대강당 채플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대강당 채플을 통해 공동체를 의식하고 신을 의식하게 되죠.” 스피노자의 말처럼 “신을 의식하면서 산다는 것은 이 세상의 면면을 살피는 것”이다. 그것은 섬세한 시선으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감사를 느끼는 미적 체험으로 이어진다. “어느 대학도 할 수 없는 이화만의 이런 가치를 바탕으로 이화가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고, 평생교육의 허브 역할을 해주었으면 좋겠어요. 이화에서 우리 사회를 위해 공헌하는 인물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주홍에 물들다 작성자 대외협력처 기부자명 약학대학 주홍장학회 첨부파일 0 작성일 2019-03-20 조회 1927 주홍에 물들다약학대학 주홍장학회 겨울과 봄의 경계인 2월 말, 쌀쌀함이 가시지 않은 교정에 약학대학 동문들이 대거 집결했다. 여고동창회마냥 왁자지껄 익숙한 수다와 흥이 넘쳐나는 현장. 바로 약학대학 소속의 주홍장학회 모임이다. 마침 2018년 장학회 결산보고와 장학금 수여식이 있는 날이라고 해서 잠깐 틈새 인터뷰를 진행했다. 주홍장학회가 아주 오래됐다고 들었어요. 처음 만들어진 계기가 있나요?▶ 정준순 회장(약학 72졸)_1982년에 약대동창회 임원간사회에서 각 기수별로 장학금을 모금하기로 하고 주홍장학회가 처음 설립되었습니다. 벌써 40여 년이 다되어 가네요. 선후배 간의 네트워킹이 끈끈하고 사회생활도 활발히 하는 동문들이라 장학회가 꾸준히 대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약대 동창이라면 누구나 세대불문하고 참여할 수 있습니다. 역사가 깊은 만큼 수혜 받은 장학생도 아주 많겠네요.▶ 정준순 회장_ 1984년 1학기부터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는데요, 매년 3명의 장학생을 선발하여 학기당 300만원 씩 1년간 장학금을 지급하는데, 지금까지 총 180여명의 장학생을 배출했습니다. 처음 3천만 원으로 시작해서 현재 약 6억 원의 후원금이 조성되었고, 매년 100~200만원씩 장학위원들이 후원하는 금액과 ‘올해의이화인’ 기수별 장학금을 십시일반 더해 장학사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주홍장학회는 우리 약학대학 학생들에게 가장 든든한 힘이라고 할 수 있죠. 주홍이라는 이름에 특별한 의미라도 있나요?▶ 하헌주 약학대학장_ 학창시절 가슴에 달고 다니던 배지 색깔이 주홍색이었어요. 약학대학 상징색인데, 우리가 모두 약대 출신이라 장학회 이름으로 삼았습니다. 정열의 색이라 그런지 주홍장학회 분들 모두가 열정적이고 활달하고 모든 일에 열심이세요. 첫줄 좌로부터 김송자(67졸), 정준순 위원장(72졸), 하헌주 약학대학장(81졸), 이강희(66졸), 이미애 약대동창회장(79졸) 두번째줄 황경수(88졸), 김경옥(72졸), 김용재(82졸), 한숙영(79졸) 세째줄 권영주 부학장, 황미경(79졸), 김해임(86졸), 황미경(86졸) 주홍장학회 참여 소감은?▶ 김송자 동문(약학 67졸)_ 2011년에 주홍장학회가 있다는 걸 알고 처음 인연을 맺게 됐어요. 바쁜데도 불구하고 모임에는 꼭 참석하려고 애씁니다. 다양한 선후배들과의 만남은 행복 그 자체거든요. 이런 기쁨과 행복을 나눌 수 있는 약대 동창들이 줄줄이 나타나길 기대합니다.▶ 김경옥 동문(약학 72졸)_ 사실 ‘약국’이라는 공간은 우리 사회의 어려운 이웃을 가장 직접적으로 많이 만나는 장소입니다. 그래서인지 약사를 직업으로 삼다보면 절로 베풀고 돕는 마음이 몸에 베이는 것 같아요. 약대 선배님들의 크고 넉넉한 마음 씀씀이를 배울 수 있다는 게 우리 주홍장학회의 최고 장점이 아닐까 싶어요.▶ 이강희 동문(약학 66졸)_ 가끔 신문이나 TV에서 평생 모은 재산을 연고도 없는 이웃대학에 쾌척하는 기사를 볼 때가 있어요. 그때마다 저는 장학금을 줄 수 있는 모교가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장학재단을 만들고 싶은 꿈이 있었는데 먼데 안가고 힘 안들이고 ‘장학이사’ 타이틀도 달고 후배들에게 장학금을 줄 수도 있어서 정말 기쁘게 참여하고 있습니다. 주홍장학회가 오랫동안 이어지면서 에피소드도 많았을 텐데요.▶ 황경수 동문(약학 88졸)_ 저는 옛날에 수혜자였다가 지금은 후원자가 된 사람입니다. 학생 때 장학금을 3번이나 받게 되서 학업을 마치는데 큰 도움을 받았어요. 졸업 후 감사한 마음을 다시 돌려주어야지 하는 생각을 했지만 실천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오래 걸렸네요. 한참 나이들은 뒤에 주홍장학회를 알게 되어 열심히 후원하고 있습니다.▶ 황미경 동문(약학 79졸)_ 저도 장학생 출신입니다.(웃음) 학교 다닐 때 어렵게 공부했는데 약대 장학금이 큰 힘이 되어 주었죠. 누구보다 장학금에 대한 애절함을 잘 알기에 어려운 후배들을 열심히 돕고 싶은 마음입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김용재 동문(약학 82졸)_ 사람들은 “기부는 하고 싶은데 돈이 없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저는 진정한 기부란 지갑보다 마음이 먼저 열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열심히 아끼고 절약해서 모은 귀한 돈을 좋은 일에 나눌 때 더 큰 기쁨과 보람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요?▶ 정준순 회장_ 선한 씨앗을 뿌린 선배님들과 동창들이 계셨기에 주홍장학회라는 사랑의 열매가 열렸다고 생각합니다. 작은 씨앗이 자라 큰 나무가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그늘과 위안을 주듯 주홍장학회도 앞으로 더 발전해서 더 큰 나눔의 통로가 되었으면 합니다. ‘Pay it forward’라는 말이 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으면 도움을 준 사람에게 되갚는 방식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제 3의 다른 사람에게 갚아가는 선행의 연쇄반응을 뜻한다. 그래서 ‘Pay it forward’는 딱 그만큼이 아니라 수 십, 수 백 배로 커지는 특성이 있다. 주홍장학회는 누구보다 ‘Pay it forward’를 잘 실천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선배에게서 받은 선행의 씨앗을 잘 키워 후배들에게 넘겨주고, 내가 받은 장학금을 다시 다른 후배들에게 돌려준다. 그야말로 주홍의 진한 물들임이다. 글_김효정 어떻게 사랑이 변하냐고요? 작성자 대외협력처 기부자명 이진영 동문(교육 04졸) 첨부파일 0 작성일 2019-03-08 조회 2407 이화사랑 소액기부캠페인 1호 후원자, 이진영 동문 어떻게 사랑이 변하냐고요? 흔히 사랑의 유효기간을 3년이라 한다. 사랑을 하면 우리 뇌의 한 요소인 미상핵이 발동하고 사랑의 묘약인 도파민이 생성된다. 그런데 불과 1년 뒤에 미상핵의 활동은 50% 줄고 그 나머지도 900일을 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 이화 사랑지수 “0”에서 시작해 해마다 이화사랑이 늘어간다는 이가 있다. 이화사랑 소액기부캠페인 1호 후원자, 이진영 동문(교육 04졸·멀티캠퍼스 근무)을 만났다. ‘이화사랑 소액기부캠페인’에 제일 먼저 참여하셨다고?- 제가 ‘이화사랑 소액기부캠페인’의 첫 후원자라니 정말 영광입니다. 지난 1월말쯤으로 기억하는데, 어느날 모교에서 보내준 ‘이화사랑 소액기부캠페인’을 안내하는 우편물을 받았어요. 너무나 낯익은 대강당 사진이 찍힌 DM 우편물을 보고 순간 마음이 설레더군요. 졸업 후 처음 받아본 모교 소식이 어찌나 반갑고 좋던지...! 바로 참여신청서를 작성해 문자로 보냈는데, ‘이화사랑 1호’에 당첨됐다니 저도 기쁩니다. ‘이화사랑 1호’일 뿐만 아니라 이화사랑 소액기부캠페인 3종 세트(이화해피펀드, 선배라면장학금, Ewha Wave 기금)를 모두 후원하셔서 ‘이화사랑 3관왕’이 되셨어요. 3개 기금에 모두 후원하신 계기는?- 일단 기금 하나당 월 만원씩이라 금액 부담이 적었어요. 매달 3만원이니까 모교와 후배들을 위해서 한 달에 밥 한 끼, 커피 값 한 번 아끼면 되겠다 싶었습니다. 솔직히 연말정산 때 세액공제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매력적이었구요. 조금 세속적인(!) 저로서는 월 3만원의 작은 금액으로 모교에 기부도 하고 세제혜택도 받으니 1석2조다 싶었죠.(웃음) 누구나 쉽게 후원할 수 있는 금액이고, 3개 기금 중에 후원자가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도 있어서 캠페인 설계를 참 잘했다는 생각을 했어요. 3개 기금에 모두 후원하신 걸 보면 애교심이 남다르신 것 같습니다.- 그 정반대에요. 솔직히 저는 아무 생각 없이 학교 다니던 학생이었습니다. 애교심 ‘제로’였죠. 그런데 졸업하구 사회생활하면서 이화사랑은 점점 더 커지고 밀도는 더 단단해지더군요. 제가 돌연변이여서가 아니라, 그냥 나이가 들면서 저절로 그렇게 됐어요. 아직 나이 어린 후배님들은 잘 모르겠지만 제 나이 되어보면 알게 될 겁니다. 이화가 내게 얼마나 큰 후광인지, 이화라는 존재만으로도 얼마나 든든하고 고마운지... 저와 이화가 ‘따로’가 아니라 ‘하나’임을 진심으로 느끼게 되죠. 나에게 이화란?- “이화는 반전매력이다!”(웃음) 사실 저는 놀 때 잘 놀고 약간의 허당기도 있는데 “이대 나왔다”고 하면 사람들이 묘한 반전매력을 느끼더군요. 잘 놀고 유쾌한데, 똑똑하고 일도 잘하는 사람으로 플러스 메이킹이 되는 거예요. 제가 일하는 곳이 IT교육서비스 분야이다 보니 이대 후배들이 많이 들어옵니다. 그런데 모두가 하나같이 스마트하고 똑 부러지게 일을 잘해요. 후배들을 보면 절로 ‘이부심’을 느낍니다. 후원금이 어떻게 쓰였으면 하는지?- 너무 작은 액수라 별로 바라는 점은 없어요, 작은 돈이지만 누군가에겐 책 한 권, 누군가에겐 작은 기회와 쉼표가 되었으면 합니다. 요즘 취업도 잘 안돼서 어렵고 힘든 시간을 보내는 20대가 많다고 하는데, 저의 후원이 모교와 후배들을 위한 작은 희망의 씨앗이 될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합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솔직히 너무 작은 금액으로 인터뷰까지 하게 돼서 부끄럽네요. 비록 소액이지만 저는 평생 후원할 생각이에요. 이화의 성장이 곧 나의 성장임을 이제는 너무나 잘 알거든요. 경쾌하고 시원한 성격이 매력적인 그녀. 이진영 동문은 인터뷰 말미에 아는 후배들에게 ‘이화사랑 소액기부캠페인’을 소개하고 싶다며 참여신청서 20부를 우편으로 보내달라고 했다. 그녀의 이화사랑 지수는 이제 100을 넘어섰다. 글_김효정 김정옥장학금 장학생의 하계 독일 어학연수기 작성자 대외협력처 기부자명 천은빈 장학생(독문 17학번) 첨부파일 0 작성일 2018-10-05 조회 1584 9월 20일(목)에 열린 제11회 이화장학후원이사회 행사에서는 김정옥장학금을 받아 독일 어학연수를 다녀온 천은빈 장학생의 괴팅엔 체험기 발표가 있었습니다. 김정옥장학금은 김희경유럽정신문화장학재단 김정옥 이사장(독문 69졸)이 독어독문학과 후배들이 재학 중에 독문학의 본고장을 방문하여 어학을 비롯한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매해 후원하는 장학금입니다. 해외에 나가서 도서관에만 앉아있지 말고, 여행도 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며 더 큰 세상을 경험하라는 뜻으로 기탁한 것입니다. 지난 여름 김정옥장학금을 받고 독일 어학연수길에 오른 천은빈 장학생! 그녀가 경험한 새로운 세상을 만나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화여자대학교 독어독문학과에 재학중인 17학번 천은빈입니다. 지난 8월, 한달동안 저를 비롯한 8명의 학생들은 김정옥 장학금을 받아 독일 괴팅엔으로 한달 동안 어학연수를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김정옥 선배님의 후원이 없었다면 저는 이런 값진 경험들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 항상 학생들에게 여러 면으로 도움을 주시는 이화여자대학교와 장학 이사님들, 그리고 사비로 매년 학생들을 지원해주시는 김정옥 선배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IIK Sommerkurs는 제 인생에 있어서 가장 즐겁고 유익했던 한달이었습니다. 한달 동안 저는 단기간 안에 제 자신을 독일어 속에 자연스럽게 노출시킬 수 있었습니다. 외국어 실력, 특히 외국어에 대한 ‘감’을 늘리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나라에서 직접 짧게나마 생활해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달 동안 괴팅엔에서 ‘생활’하면서 저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부분에서 독일어를 접했습니다. 수업은 물론이고, 마트에서 물건을 구매할 때,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할 때, 길을 모를 때 등등 아주 사소한 일에서도 저는 어떻게든 짧은 단어들을 조합해 독일어 문장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또한 그 뿐만 아니라 생활용품들을 살 때에도 모르는 단어가 많아서 마트에서 한 시간 동안 단어 하나하나를 사전에 찾아서 비교해가며 물건을 구매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한달 동안 누군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살아가기 위해 공부아닌 공부를 하다보니 자연스레 독일어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매일매일 생활 독일어를 배웠다면, 수업 시간에는 조금 더 학문적인 독일어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학교에 도착한 첫 날 치룬 시험을 바탕으로 모든 학생들은 총 12개의 반으로 나누어졌습니다. 수업에선 다양한 주제를 퀴즈, 편지 쓰기, 역할극, 가상의 행사 계획 등 여러가지 방법으로 다루면서 회화, 작문, 청해를 골고루 연습했습니다. 학생들이 서로 비슷한 수준의 독일어 실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실수를 하는 것이 부끄럽게 느껴지지 않았고, 서로 부족한 점은 채워주고 도와주면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저는 수업을 통해 독일어에 대한 실력과 더불어 흥미까지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계 연수 프로그램이 유익했던 이유는 단순히 ‘독일어’ 공부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독일어 공부와 더불어 저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소중한 경험들과 인연들을 얻었습니다. 하계 연수 프로그램에는 독일어 수업 이외에도 많은 유익한 프로그램들이 있었습니다. 매일 12:45분에 수업이 끝나고나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학교 식당인 Mensa나 카페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이때 다른 학생들과 같이 밥을 먹으면서 서로에 대해 더 알아갈 수 있었습니다. 밥을 먹고 난 후에는 여러가지 오후 활동이 있었습니다. 오후 활동의 종류에는 체육, 요리, 춤, 노래, 가벼운 독일어 수업 등이 있었는데, 선택은 자율적이었기 때문에 학생들은 자신의 흥미에 따라 활동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말에는 괴팅엔 근교 도시로 소풍을 떠나 아름다운 독일의 도시와 그 곳의 역사들을 배울 수도 있었습니다. 그 시간들을 통해 저는 괴팅엔 생활에 더 즐겁게 잘 적응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새로운 친구들을 많이 사귈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경험들이 즐거웠지만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은 Laenderabend 라는 서로의 나라를 소개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매주 금요일 저녁에 진행되었는데, 각자 자신의 나라를 소개하며 노래를 부르거나, 퀴즈를 냈고, 음식을 나눠먹기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렇게 많은 나라의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서로의 문화를 배우며 하나가 되는 일은 한국에서는 해보지 못했던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세계사 책으로는 배울 수 없는 현지인들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매우 흥미로웠고, 외국어에 관심이 많은 저로써는 여러 나라 말을 배울 수 있는 자리이기도 했기에 더욱 의미 있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를 소개하는 차례에는 다른 학생들이 우리나라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흥미롭게 바라보는 것을 보며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한달 간의 괴팅엔 생활은 저에게 단순히 어학 연수 그 이상의 너무나도 많은 것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 가장 큰 얻음은 바로 ‘용기’였습니다. 그동안 저는 원하는 것이 있어도 먼저 다가가는 것이 어렵게만 느껴졌었습니다. 잘못되면 어떡하지? 실수하면 어떡하지? 시도를 해보기도 전에 미리 겁부터 먹고 도망쳤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제자리에서 빙빙 돌고 있는 제 자신이 답답하게 느껴졌고, 그런 모습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던 중 이번 하계 연수는 저에게 변화의 기폭제가 되어 주었습니다. 저의 기존 생활과는 모든 것이 다른 괴팅엔에서 매일매일은 도전이었고 용기였습니다. 저는 먼저 다른 나라 학생들에게 인사를 건넸고, 밥을 같이 먹자고 제안했으며, 그들의 언어를 배우기도 했습니다. 선생님의 질문에 확실하지 않아도 대답을 해보았고, 모르는 것이 생기면 질문을 했습니다. 한번도 배워본 적 없는 춤을 배웠고, 합창에 참여했으며, 요리에도 도전했습니다. 물론 모든 것이 성공적이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결과와 상관 없이 도전을 했다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바로 성공이었습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처럼 첫 마디를 꺼내기는 어려웠지만 한번 해보고 나니, 두 번 세 번은 간단 했고 어느새 저는 열 번 스무 번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에 돌아온 지 3주가 지난 지금, 저는 여전히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괴팅엔에서 도전의 즐거움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서서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있는 순간도 지난 한달이 없었다면 불가능 했을 것입니다. 지난 10년동안 수많은 학생들에게 이런 선물과도 같은 한달을 선물해주신 김정옥 선배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보다 더 많은 학생들에게 보다 더 많은 기회를 주기 위해 항상 노력하시는 많은 장학 이사님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저 또한 제가 나눔 받았던 것처럼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이화 3대가족, 100세 어머니를 위한 특별한 기부 작성자 대외협력처 기부자명 최청규 동문(영문 65졸) 첨부파일 0 작성일 2018-09-19 조회 3369 추석을 앞둔 초가을 캠퍼스에 특별한 손님이 방문했다. 올해 백수(白壽)를 맞은 방숙자 동문(가사과 42졸)과 딸 최청규 동문(영문 65졸), 외손녀 곽상희 동문(영문 92졸) 등 이화 3대가족이 오랜만에 모교 나들이에 나선 것. 딸 최청규 동문은 “다음달 10월이면 어머니가 100세 생일을 맞으신다. 어머니 백수를 기념해 감사의 마음을 담아 모교에 장학금을 기탁하기로 했다”고 방문 계기를 밝혔다. 이들 이화 3대가족은 김혜숙 총장과 만난 자리에서 모교 후배들을 위해 써달라며 현우3代모녀장학금 3천만원을 약정했다. 올해 100세의 나이가 무색할 만큼 정정한 걸음으로 모교를 찾은 방숙자 동문은 “딸과 외손녀까지 3대가 이화를 나온 것은 인생의 큰 보람”이라고 자부심을 보였다. 최청규 동문은 졸업 후 20여 년간 본교에서 영문학 강사로 활동했고 맏딸인 곽상희 동문은 영문과 졸업 후 IBM을 다녔다. 이들 3대 모녀는 이화동문이라는 점 외에도 남편이 모두 대학교수라는 공통분모가 있어 서로 잘 통한다고 한다. 최청규 동문은 “모녀 3대가 모두 긍정적이고 낙천적이면서 진취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데 이는 이화가 우리에게 준 값진 유전자”라면서 “이화 팬인 남편은 이화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딸에게 무조건 이화대학에 가야한다고 저보다 더 권할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3대인 곽상희 동문은 “아버지의 이화사랑 덕분에 4년 장학생으로 들어와 생활비를 받으며 공부하는 행운을 누렸다”면서 “졸업 후 사회생활을 할 때 남녀공학에서는 결코 배울 수 없는 여성리더십과 역량을 이화에서 배웠음을 알게 됐다”고 이화 예찬론을 폈다. 특히 곽 동문은 “제가 대학에 입학할 당시만 해도 학교 운동장에 방을 붙여 합격자 발표를 했는데, 할머니를 학교에 모시고 와서 합격자 방 앞에서 사진 백 장을 찍으며 3대 이화가족의 탄생을 기뻐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제가 아들만 둘이라 이화 4대 가족의 꿈을 이룰 수 없게 됐다”고 말해 웃음꽃을 피웠다. 최청규 동문은 먼 훗날 집안의 유일한 손녀가 이화여대에 입학해 4대 동창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고 전했다. 방숙자 동문 가족. 좌로부터 방숙자 동문, 딸 최청규 동문, 외손녀 곽상희 동문, 친손녀 최정윤 동문(성악 98졸) 글_김효정 도서관 1인 열람석도 후원할 수 있나요? 작성자 대외협력처 기부자명 이지언 동문(사회복지 박사 16졸) 첨부파일 0 작성일 2018-08-31 조회 6945 최근 중앙도서관 3층 300대 일반자료실 창가가 산뜻하게 변신했다. 창가에 오래된 1인용 책상들이 치워지고 깔끔한 3인용 책상 4개와 스탠드가 새로 놓인 것. 남들이 주목하지 않은 숨은 이 공간에 밝고 따뜻한 숨결을 불어넣은 후원자가 있다. 바로 오늘의 기부스토리 주인공, 이지언 동문(사회복지 박사 16졸)이다. - 도서관 자료실 책상 교체를 위해 후원하셨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으신가요?제가 2015년에 박사학위 논문을 쓰느라 매일 도서관 자료실에 와서 살았어요. 자료실 문을 여는 9시에서 오후 5시까지 꼬박 3층 자료실 1인용 책상에서 자료도 찾고 책도 읽고 논문도 썼습니다. 정말 저의 하루가 오롯이 담긴 애정어린 공간이죠. 그런데 제가 너무 사랑하는 이 공간에 책상이 너무 오래돼서 낡고 삐걱거리는 것이 마음에 걸리더라구요. 최근 학교 도서관이 리모델링되고 화장실도 호텔급으로 좋아졌는데, 여전히 1인용 나무 책상은 그대로인 거예요. 그래서 ‘다는 못하고 하나만이라도 내가 바꿔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이번 여름학기 강사료 3백만원을 도서관열람환경개선기금으로 후원하게 됐습니다. - 그래도 직접 책상을 바꾸기 위해 후원하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저도 학교에 기부해 본 경험이 없어서 처음에 망설였어요. 용기를 내서 대외협력처에 누구인지도 밝히지 않고 중앙도서관에 1인 열람석을 후원할 수 있는지를 물었는데 너무 친절하게 안내해 주시고, 도서관과 협의한 후 가능여부를 신속하게 피드백 해주셔서 좋았어요. 후원을 통해 제 생각이 현실로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 제겐 너무나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저도 사실 박사 논문을 쓰는 1년 동안 이화국제재단의 장학금을 받으면서 공부했어요. 나중에 장학금을 다시 되돌려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후배들을 위해 책상이라도 새로 해줄 수 있어서 기쁩니다. 요즘 공부하는 사람 자리는 책상과 노트북, 조명이 필수잖아요? 그래서 특별히 콘센트와 스탠드가 있는 책상으로 해달라고 요청 드렸는데, 도서관에서 이처럼 예쁘게 완성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후원한 책상들을 직접 보신 소감은요?‘아, 이런 기분에 사람들이 후원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제가 후원한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학생들을 보니 너무 뿌듯하고 감동인 거예요. 정말 만족도 100%입니다. 개강하고 나면 명당자리라고 소문나서 학생들이 더 많이 찾지 않을까 내심 기대해 봅니다. - 이화의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저는 이곳 3층 자료실 1인용 책상 위에서 박사논문과 10편의 연구논문을 탄생시켰어요. 그 덕분에 올해 7월에는 사회복지연구소 연구교수로 임용도 되었구요. 우리 후배들도 이 도서관 책상 위에서 꿈을 키우고 사고의 폭을 넓히고 미래를 열어갔으면 합니다. 그리고 도서관 책상 바꾸는 일을 캠페인처럼 이어갔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다 바꾸기는 어렵지만 한 사람 한사람의 정성이 모인다면 더 나은 우리들의 도서관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후원한 도서관 자료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이지언 동문. 학생들이 새로 바뀐 300번대 자료실 창가 책상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글_김효정 과동창회에서 맺은 EGPP 인연 작성자 대외협력처 기부자명 장선 前인춘재단 이사장(영문 72졸) 첨부파일 0 작성일 2018-07-10 조회 1193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인재로 성장하길” 후원자 장선 前인춘재단 이사장 · 영문 72졸 “시작은 우연이었습니다. 영문과 총동창회 행사에서 교수님이 한 학생을 소개하셨어요. 큰 화상을 입어 수십 번의 큰 수술을 받았지만 늘 밝은 미소를 잃지 않는 정말 소중한 학생이라고요.” 그렇게 우연히 알게 된 학생이 바로 최려나 학생이었다. 장선 前인춘재단 이사장(영문 72졸)은 최려나 학생을 도와주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인연은 시작되었다.최려나 학생은 EGPP장학금을 받은 이후 편지로 장 이사장에게 안부를 전하곤 했다. 올해 2월, 장 이사장 앞으로 또 한 번 긴 손편지가 도착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치료받는 환자에서 여느 또래처럼 여대생으로 돌아와 줄 수 있게 해주셨고, 꿈을 향해 걸어갈 수 있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편지를 받은 장 이사장은 따뜻한 미소로 이렇게 건강하게 학업을 마친 최려나 학생에게 오히려 더 고맙다고 했다.“최려나 후배처럼 EGPP장학생들이 이화에서 잘 공부해 글로벌 여성인재로 성장한다면 그보다 큰 보람이 있을까요. EGPP장학생들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 여성리더로서 세상과 긍정적인 영향력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장 이사장은 제2의 최려나를 키우기 위해 또 한 명의 EGPP장학생에게 3년간 장학금을 후원하기로 약속했다.장 이사장이 장학생들과 인연을 맺게 된 바탕에는 부모님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부모님 두 분 모두 사범학교 출신이셔서 교육에 관심이 많으셨어요. 아버지께서는 아이들에게 물고기 잡는 방법을 알려줘야 하니, 교육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죠. 그런 모습을 봐왔기 때문에 장학재단을 만드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어요.”장 이사장을 포함한 4남매는 2013년 부모님(아버지 故장몽인 님, 어머니 故이춘희 님)의 이름을 한자씩 딴 ‘인춘재단’을 만들어 다양한 장학 및 복지사업을 해오고 있다. 장 이사장은 개인적으로 2000년부터 본교에 SUN장학금을 비롯해 자신의 호를 딴 우향(又香)장학금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좌절 속에서 희망의 빛을 찾게 해준 나의 이화”EGPP장학생 최려나 · 영문 18졸 “누워서만 지낼 때에는 앉아 있게 되기를 기다렸고, 앉아 있게 되어서는 설 수 있기를 기다렸습니다. 그것이 성취되었을 때는 걷기를, 밖에 나가기를, 그리고 학교에 다닐 수 있기를……”딱 10년 만이었다. EGPP장학금 덕분에 최려나(영문 18졸) 학생은 꿈에 그리던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중국 국적의 그녀는 11살 때 불의의 사고로 전신 화상을 입었고, 이후 40여 차례의 수술을 받아야 했다. 병원과 집을 오가던 중에도 배움에 대한 열망이 사그라지지 않았다는 최려나 학생. 그녀는 간절했던 만큼 열심히 학업에 매진했고, 그 누구보다도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아냈다. 그 결과 지난 2월 생애 첫 졸업식을 앞두고 장 이사장에게 두 번째 편지를 전했다. “꿈에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다 보니 저의 4년 학부생활도 끝났습니다. 좌절 속에서 희망의 빛을 찾게 해준 이화, 이화에서의 4년은 저에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하고 값진 시간이었습니다.”라며 지난 시간의 소회와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이화에서 받은 사랑을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며 살고 싶어 본교 대학원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한 최려나 학생. 따뜻한 봄 햇살처럼 밝은 미소를 잃지 않는 그녀의 앞날에 꽃길이 이어지길 응원해본다. 글_이현주 더 이해하고 더 나누는 삶 작성자 대외협력처 기부자명 전송미 ㈜딜라이트디엔씨 대표(영문 83졸) 첨부파일 0 작성일 2018-07-10 조회 2485 ‘필요한 것은 다시 채워진다’는 믿음“이화에 대해 늘 고마운 마음이 있었어요.” 이대부초, 이대부중, 이화여대까지 학창시절의 4분의 3을 이화에서 보냈고, 여성사업가로 성공할 수 있었던 바탕에도 이화 안에서 만들어준 많은 인연들의 도움이 있었다. 전송미 ㈜딜라이트디엔씨 대표(영문 83졸)가 2018년 1월, 모교 이화를 방문해 ‘이화미래전략기금’ 1억원을 기부했다. “사실 개인적으로 작은 돈은 아니었어요. 그래도 이화에 기여하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고, 필요한 것은 늘 채워진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필요하면 더 벌면 되지 하는 생각으로 약간 무리를 했어요.” 전송미 대표는 이번 기부에 대해 이렇게 솔직한 마음을 보였다.영문학도에서 종합건설회사 대표로전송미 대표가 경영하는 ㈜딜라이트디엔씨는 종합건설회사다. 유학을 다녀와서 인테리어 설계분야에서 일하다 40대에 독립해 인테리어 스튜디오를 오픈했다. 의욕적으로 일을 하다 보니 큰 프로젝트를 수주하게 되었고, 건설, 소방, 설비, 전기, 통신 등 하나씩 면허와 조건을 갖추다 보니 어느새 종합건설회사가 되어 있었다. 사실 전송미 대표는 이화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머니는 영문과 은퇴교수이신 나영균 교수, 언니는 현직 영어영문학부 전수용 교수다. 미국에 사는 큰언니도 이대 영문과 출신. 네 모녀가 이대 영문과 출신인데, 그녀는 졸업 후 떠난 미국 유학길에서 ‘인테리어 디자인’으로 과감하게 전공을 바꿨다. 그런데 다시 대학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녀는 여전히 인문학을 선택할 것 같단다. “디자인은 사람들의 필요를 파악하고, 그것을 구현하는 방법을 제시해야 한다는 점에서 순수미술과 많은 차이가 있어요.” 그녀의 디자인 철학에는 ‘사람 중심’이라는 깊은 전제가 있다. 아마도 4년간 인문학도로서의 대학생활이 그녀에게 미친 영향이 아닐까.서로 이해하고, 더불어 사는 세상을 위해전송미 대표가 학교에 다닐 때 5·18이 있었고, 휴교를 많이 했다. 우리가 외친다고 세상이 달라질까 회의적인 생각에 학생운동과는 담을 쌓았다. 어머니가 엄격하셔서 미팅 금지, 동아리 금지, 6시 통금의 규율 가운데서도 몰래 미팅도 하고 연애도 하면서 평범한 대학생활을 했다. 그런데 졸업하고 보니 스스로가 ‘자신감’ 있는 여성이 됐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이화가 4년간 드러내놓고 가르친 것은 아니었지만,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자신감 있게 사는 법을 스며들 듯 배우게 된 것 같아요.” 좋은 학교에서 좋은 교육을 받았다는 생각은 자연스레 자신이 받은 것을 사회에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발전했다. “어떤 위치에 있든, 나만 잘되기 위해 주변을 밟는 편협한 이기주의를 가장 경계했으면 좋겠어요.” 조금 더 남을 이해하려 해보고, 자기의 욕심을 조금만 더 버리고 더불어 사는 세상을 추구한다면 그래도 우리가 사는 세상이 나아지지 않을까 물으며 활짝 웃어 보였다. 글_강혜송 최선을 다해 벌고 최선을 다해 주라 작성자 대외협력처 기부자명 금홍연 동문(화학 79졸) 첨부파일 0 작성일 2018-07-10 조회 1785 의식주가 해결되면 나누며 살아야‘최선을 다해 벌라. 최선을 다해 저축하라. 그리고 최선을 다해 주라.’ 금홍연 동문(화학 79졸)은 40대 초반, 새벽예배 중에 처음 들은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의 말씀이 아직도 생생하다. “듣는 순간 가슴에 콕 박히더라구요. 그날 다짐했습니다. 물질의 삶은 어느 수준이 되면 만족하겠다고. 그 이상은 쌓지 않고 나누며 살겠다고요.” 20여 년이 지난 지금, 금 동문의 다짐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금 동문은 봉제사업을 하던 남편 강건 씨를 따라 중남미 온두라스에서 17년째 살고 있다. 먼 타국에서도 “먹고 살만큼 벌면 모두 나눠야 한다”는 소신을 지켰다. 남편과 함께 현지인을 위한 교회를 짓고, 병원을 후원하고, 한국인을 위한 교회도 지었다. 그리고 지난해 10월, 귀국하자마자 모교에 화학·나노과학전공 발전기금 9만 달러(한화 1억6십만원)를 쾌척했다. “남편이 환갑일 때 모교에 기금을 많이 내더라구요. 그래서 저도 당연히 환갑 때 하겠다고 준비했는데 도통 소식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먼저 학교에 전화했어요. 기부하겠다고.” 그녀의 기부 동기가 참 심플하다.기도는 나의 힘금 동문은 이화에서 자기 인생을 바꾼 하나님을 만나게 됐다고 한다. 아버지는 어릴 때 일찍 돌아가시고 대학 2학년 때 어머니와 이별했다. 막막했던 시절, 채플시간에 우연히 들은 찬송가가 그녀를 인도했다. “‘캄캄한 밤 사나운 바람 불 때’라는 곡이였는데 가사가 정말 제 처지와 같은 거예요. 그길로 무작정 기도실에 찾아가 기도드렸어요.” 그렇게 시작된 하나님과의 만남. 기도도 운동처럼 훈련이 필요하다는 그녀는 매일 1시간 새벽기도를 40년째 이어오고 있다. “친구들은 제가 낙천적이래요. 늘 웃어서 그런가 봐요. 남편 사업도 큰 일 없이 꾸준히 성장했구요. 근데 저라고 쉬웠겠어요. 고난을 기도의 힘으로 넘긴 거지요.” 기도는 그녀의 삶을 관통했다. 어떤 일도 피하거나 징징대지 않고 평상심으로 마주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사실 금 동문은 오랫동안 치매인 시어머니를 간병해야 했다. “물론 힘들지만 울고 짜고 안 했어요. 제가 일찍 부모님을 여의어서 그런지 피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걸 알고 ‘그냥’ 했어요.”라며 담담하게 미소 짓는다. 이 또한 기도의 내공인가 싶었다.역시, 우리는 이화금 동문은 이대 출신이어서 좋은 이유가 ‘좋은 친구들과 함께 늙을 수 있어서’라고 했다. 꼰대 노릇을 하지 않고 늘 시대에 유연하게 적응하고 소통하는 친구들의 모습에서 ‘역시 우리는 이화’라는 자부심이 든다고. “지금 학교가 많이 힘들잖아요. 이화가 다시 힘을 내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각자 작은 힘이라도 보태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다시 이화의 자부심을 찾을 수 있어요.” 모든 22만 동문이 십시일반에 나서야 한다는 금 동문. 그녀의 말 속에 이화에 대한 애정이 담뿍 담겨 있다. 글_김효정 이화는 내 인생의 행복 충전소 작성자 대외협력처 기부자명 최비숙 갤러리 라이프 관장(의직 80졸) 첨부파일 0 작성일 2018-07-10 조회 1638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준 이화2017년 12월, ‘갤러리 라이프’ 관장이자 당시 의류직물학과(現 의류산업학과) 동창회장이었던 최비숙 동문(의직 80졸)이 이화여대를 찾아 ‘의류산업학과기금’ 1억원을 쾌척했다. 학과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느껴지는 최 관장에게 기부 계기에 대해 좀 더 물었다. “제가 이대에서 시간강사를 할 때 이대 후배들의 학습능력이 참 뛰어났어요. 앞으로 사회에 나가서 여성 지도자로 크게 될 가능성과 희망을 보았죠. 그런 후배들이 꿈과 능력을 마음껏 키울 수 있도록 훌륭한 학습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었습니다.” 최 관장의 열정 있는 목소리와 화사한 미소는 상대방의 마음까지 기분 좋게 했다. “그리고 이화는 저에게 큰 행복을 준 곳이에요. 학부, 석사, 박사 그리고 시간강사까지… 20년을 이화 교정에서 보냈어요. 도서관에서 논문을 쓰며 보냈던 시간, 밤새워 동아리 사진전을 준비했던 추억 등 이 모든 경험들이 제 인생의 밑거름이 되어 제 꿈을 실현시킬 수 있도록 도와줬습니다.”새로움과 다름의 공간 ‘갤러리 라이프’최비숙 관장은 오랫동안 품고 있던 꿈을 이뤄 지난 2016년, 환갑을 기념하며 ‘갤러리 라이프’를 개관했다. “갤러리를 열 때 컨셉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어요. 이왕이면 도전적이고 창의성이 있는 젊은 작가들의 전시를 지원해주고 싶었죠. 기성 원로작가 분들은 좀 더 좋은 곳에서 전시를 하실 수 있으니까요. 저는 새로움과 다름을 추구하려고 도전하는 신진 작가들에게 기회를 주고 그들을 키우는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저희 갤러리가 그들에게 소중한 발판이 되어주길 바라는 마음이에요.”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젊은 작가들을 볼 때면 제자이자 후배들 같아서 더 애정이 간다는 최 관장. 최 관장의 열정과 젊은 후배들을 위한 따뜻한 마음이 느껴졌다.의류산업학과에서 배운 콜라보레이션다양성과 창의성, 그리고 새로움. 최비숙 관장이 작가들을 지원할 때 그림을 보는 관점이다. 이런 관점을 가지게 된 것은 최 관장의 전공과 연관이 있다고 설명했다. “의류직물학과(現 의류산업학과)에서는 디자인, 직조, 드로잉, 염색 등 다양한 분야를 배우고, 이 분야들을 함께 접목한 콜라보 작업을 많이 해요. 그 안에서 새로운 것들을 많이 만들어낼 수 있었죠. 창의력도 키울 수 있었고요. 최근 문화예술 분야에서 창의적인 작업을 펼치는 실력 있는 의류산업학과 후배들을 많이 만나는데 정말 기쁘고 반가워요. 앞으로도 이런 융합형 인재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면 좋겠고, 제가 낸 의류산업학과기금도 거기에 작은 디딤돌 역할을 했으면 합니다.” 이화 안에서 꿈을 키우고 이화를 통해 그 꿈을 실현시킨 최 관장. 그녀의 바람대로 앞으로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가는 창의적인 인재들이 이화에서 많이 배출되길 바란다. 글_정세진 딸바보 아빠의 사랑법 작성자 대외협력처 기부자명 김낙찬 현재어학원 이사장 첨부파일 0 작성일 2018-07-10 조회 1544 바야흐로 딸들의 전성시대다. 덕분에 대한민국에는 딸 앞에서는 모든 것이 무장해제되는 ‘딸바보’들이 넘쳐난다. 김낙찬 현재어학원 이사장 역시 스스로를 ‘딸바보’라 부른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운영하는 어학원도, 학원 건물명도 딸 이름을 따서 ‘현재’라고 붙였다. 심지어 한 학기에 한 명씩 전액등록금을 후원하고 싶다며 이화여대에 기탁한 장학금명도 ‘현재장학금’이다. 가히 딸바보 계보의 정점이다. 이런 아빠를 보고 딸이 가끔 “내 이름을 너무 판다”고 투덜댄다고.사실 현재라는 이름은 ‘어진 재상이 되라’는 뜻도 있지만 ‘현재(Now)에 충실하라’는 중의적 의미도 담고 있다. “지금 현재에 충실하자는 것은 제 인생 모토예요. 다른 곳에 눈 돌리지 않고 매일매일 현재를 성실히 살려고 노력합니다. 충실한 가장으로서 아내와 딸에게 인정받는 아빠가 되는 것, 그것이 저의 존재 이유이기도 해요”김낙찬 이사장에게 교육은 사업이 아니라 소명이다. 그는 매일 아침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 7번 감사기도를 드린다. 내실 있는 학원 경영을 위해 매일 직접 문법책도 집필하고 있다.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성경말씀이 있어요. 사업은 제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제가 잘나서 되는 것도 아니예요. 하나님께서 알아서 은혜를 주시는 거죠. 저는 그저 감사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날에 충실할 뿐입니다.”김 이사장은 2011년부터 저소득층 청소년에게 매년 1억원을 후원하고 있다. 작년 모친 별세 후에는 어머니께 드렸던 용돈을 모아 이화여대에 현재장학금을 기부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머니는 용돈 드리면 바로 충북 꽃동네에 기부하셨어요. 어머니의 기독교 정신을 배우고 따라하는 거지요” 라며 겸손해했다. “제 딸이 이화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동문 교수님들을 보면서 나도 뭔가 해보겠다는 자극을 받는 것 같아요. 앞으로도 제 딸뿐만 아니라 많은 이화의 딸들이 우리 사회를 이끄는 훌륭한 인재로 성장하길 바랍니다.” 내 딸을 사랑해서 다른 딸을 위한 장학금을 쾌척한 김낙찬 이사장. 딸바보 아빠의 사랑법이 참 근사하다. 글_김효정 '얼굴 없는 기부천사' 본교에 다녀가 작성자 대외협력처 기부자명 익명기부 첨부파일 0 작성일 2018-05-09 조회 1901 본교에 ‘얼굴 없는 기부천사’가 나타났다. 신분을 밝히지 않은 익명의 기부자가 지난 5월 2일 낮 12시 30분쯤 교내 ECC 지하 4층 ‘이화 도너스월(Ewha Donors Wall)’ 앞에 현금 495만원이 든 캐리어를 놓고 간 것이다. 도너스월 바로 옆 이삼봉홀에서는 대외협력처가 주관한 동창 초청 행사인 모여라 이화동창 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동창 100여 명이 참석해 하루 동안 입학부터 졸업까지 경험하는 홈커밍데이 형태로 대외협력처가 올해 처음으로 기획, 개최한 행사였다. 이 때문에 행사에 참석한 동창이 기부금을 놓고 간 것이 아닐까 추측이 일기도 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 캐리어 위에는 ‘이화여대 덕후가 기부하고 갑니다(현금 495만원+구르마)’라고 적힌 서류 봉투가 놓여 있었으며 서류 봉투 안에는 5만원권 99장 총 495만원이 들어 있었다. 현금 외에도 과자, 초콜릿, 피로회복제, 일명 ‘야잠’으로 불리는 이화여대 야구점퍼, 『82년생 김지영』 책 등도 발견됐다. 본교 캠퍼스에 익명으로 기부금을 놓고 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대외협력처는 이름을 밝히지 않고 이화를 응원해주신 후원자의 뜻을 존중해 누구인지 찾지는 않기로 했다. 기부금은 전액 학생복지를 위한 ‘이화해피펀드’ 기금으로 활용된다. [관련 기사보기]연합뉴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8/05/04/0200000000AKR20180504147100004.HTML?input=1195m에듀동아 http://edu.donga.com/?p=article ps=view at_no=20180504105354474162mrrh한국경제 http://news.hankyung.com/article/201805040956g 처음 12 1 2 다음 페이지 끝